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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월 24일 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歷史) 2007. 1. 24. 00:48

     
    1월 24일 오늘의 역사


    국내
      1624(조선 인조  2)  이괄의 난 일어남
      1891(조선 고종 28)  <승정원일기> 개수
      1907  대한매일신보, 한일조약 부인의 칙서를 게재
      1930  김좌진 장군 북만주 산시역 앞에서 옛 부하에게 피살
      1932  항일투사 이장녕 순국
      1946  신탁통치 논의, 기간은 미국은 10년을 소련은 5년을 주장
      1946  남한에 반탁투쟁위원회 결성
      1948  <동의보감> 목판 전주에서 발견
      1969  쌀값 통제령 발표
      1973  월남종전에 박정희 대통령 서명
      1976  재일동포 구정귀성단 1진 527명 모국 방문
      1991  정부, 정신대문제 실무대책반 설치
      1996  대법원, 비행가능성이 높은 청소년에게 사회봉사명령 적용
      1997  전주에서 동계 유니버시아드 열림
      1998  발해탐사 대원 뗏목항해 25일만에 실패, 대원 4명 전원 사망

      2007  '인혁당사건' 관련자 무죄판결


    해외
         41  제3대 로마황제 '칼리쿨라' 암살
      1260  원나라 쿠빌라이 황제 즉위
      1776  독일 작가 호프만 태어남
      1848  캘리포니아에서 금광 발견, 골드 러쉬의 발단
      1908  영국의 베이든 포엘 장군, 보이 스카우트 창설
      1958  멘델스존의 '한여름밤의 꿈' 서곡이 웨딩마치로 처음 연주됨
      1965  영국의 정치가 윈스톤 처칠(1874-1965) 별세
      1978  소련 핵추진 인공위성, 캐나다에 추락
      1979  왜국 고사기 편찬자 태안만려 유해와 동비문, 일본 나라(奈良)에서 발견
      1981  중국 사천성 일대에 진도 6.9의 지진 발생, 200여명 사망
      1983  일본, 유사시 대한해협 봉쇄 언명
      1985  디스커버리호 발사
      1993  미국 연방대법원 최초의 흑인 판사 '마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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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 말라고 억제하면 할수록 더욱 하고 싶은 욕구가 강해지는 현상에 대해 심리학자들이
    붙인 이름이 ‘칼리굴라 효과’이다. 이 ‘칼리굴라 효과’와 관련 있는 인물이 제3대 로마황제
    '칼리굴라'인데 그의 행위에서 따온 용어이다.


    '칼리쿨라'는 제3대 로마황제(37~41)로 본명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이며 '칼리굴라'는 별명이다. 그는 티베리우스황제의 양아들 게르마니우스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시절을 줄곧 병영에서 보냈는데 이 무렵 애용하던 유아용 군화(칼리굴라)에 연유하여
    칼리굴라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황제가 된 초기에는 현명한 황제로 명망을 얻었으나 중병을 앍고 난 이후 정신분열증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원로원을 무시하고 유력자를 시기심에 못이겨 처형하였으며, 자신에
    대하여 신격화를 요구했다. 특히 황제에 대한 예배의 강요는 유대인들이 로마에 저항을 시작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39~40년 갈리아 지방의 전투를 지휘하고 돌아온 그는 자신에 대한
    음모의 불안에 시달리다가 41년 1월 아내와 어린 딸과 함께 암살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저물어가는 명나라와 새로 세력을 키워가던
    금나라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던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하는 인조반정이 성공
    하였으나 인조반정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서로 공을 다투며 정적을 제거하는 니전투구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때 정적을 제거하는 가장 좋은 방법중의 하나가 역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씌우는 일이고
    그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가고 있을 때였다.


    누구보다도 인조반정의 공이 컷던 이괄(李适)도 예상밖으로 2등 공신에 봉해진데다가
    한직이며 변방인 평안도 병마 절도사로 좌천되어 불만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런데다가
    반역을 꾀한다는 모함을 받아 아들이 체포되자 자신을 숙청하려는 음모임을 눈치채고
    부하인 기익헌 등과 함께 인조 2년인 1624년에 난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한때 서울을 점령하였고 인조는 공주의 공산성으로 서울을 버리고 피난을 하였다.
    그러나 서울을 점령한 반군은 하루만에 정부군에 패하여 이괄은 부하에게 죽었다.


    이 난에에서 살아남아 도망친 잔당들은 후금으로 달아나 후금을 선동하여 정묘호란이
    일어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삼일천하(三日天下)라는 용어는 여기서 부터 생겼다.



    1930년 1월 24일에는 독립운동사의 큰별이였던 백야 김좌진 장군이 암살로 세상을 떠났다.

     

     


    백야 김좌진 장군은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출생하여 일찍 가친(家親)을 여의었다. 장군은
    1904년 불과 15세의 나이로 가노(家奴)들을 해방시키고 토지를 소작인들에게 분배하는 등의
    근대화에 앞장섰으며, 이듬해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설립하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등의 간부로 활동하다가 1913년에 대한광복단
    (大韓光復團)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위해 활동하다 1915년 체포되어 3년간 복역하고
    1917년 만주로 망명했다. 1919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여 총사령관에 취임하고,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는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를 설치하였다.


    여기서 양성된 장교와 북로군정서 병력을 이끌고 1920년 청산리(靑山里) 전투를 총지휘하며
    일본군 제19·21사단을 상대로 무장독립운동사상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는 일본군에게
    독립군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시켰으며 중국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심었다.


    그 뒤 헤이룽강[黑龍江(흑룡강)] 부근으로 부대를 이동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고 부총재로 취임했다가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닝안[寧安(영안)]에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고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워
    정예군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후 이념과 투쟁방법을 두고 이합집산하는 독립운동 단체의 단결과
    항일투쟁에 힘쓰다가 과거 자신의 부하였던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의 김일성(金一星)·
    박상실(朴相實) 등에게 영안현(永安縣) 중동선(中東線) 산시역(山市驛) 자택 앞에서 암살당했다.

     

    김좌진 장군의 생가와 사당 포스트 보기
    http://blog.daum.net/roadtour/3195651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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