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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산 보원사지 [普願寺址]
    여행기 2007. 1. 2. 14:59

     

    서산 보원사지 [普願寺址]


     

     

    가야산은 충남의 명산인데 옛 백제의 수도였던 공와 부여를 바다로 부터 외풍을 막으며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공주에서 서쪽으로 가야산을 넘으면 서산의 운산이 나오게 되는데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雲山面) 용현리(龍賢里)에 해당되는 산을
    상왕산(象王山)이라고 한다. 이 산의 남쪽에는 개심사가 자리하고 있고 북쪽에는 예로부터
    보원사가 있어왔다. 지금은 절터만 덩그러니 남아 있지만 백제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낮추어 잡아도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초로 창건시기를 짐작하기도 할 만큼 고찰이다.


    그러나 이곳은 백제가 중국을 상대로 무역을 함에 있어서 육로 교통의 요충지이며 서해에서
    배를 내려 짐을 가지고 가다보면 중간 기착지에 해당하는 곳이다. 뜸하게 오가는 무역상들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시설이 사찰이였을 것이므로 백제때부터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다만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인데 보원사는 통일신라기에서 고려초까지
    크게 번성하였던 것만은 틀림이 없어 보인다.

     

     

     


    이곳은 고려때 왕사와 국사를 지냈던 법인국사 탄문스님의 사리를 모신 탑과 비가 있는 곳
    으로 주변에 100여개의 암자와 1,000여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대찰이였다.
    이 절터에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대형 철불 2구가 있었는데 지금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중이다. 또 1967년에는 백제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금동여래
    입상이 출토되어 백제, 신라, 고려의 불교미술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사적지다.


    현재 건물은 한동도 없고 아주 넓은 절터에는 보물로 지정된 석조(石槽:보물 102)·당간지주
    (幢竿支柱:보물 103)·5층석탑(石塔:보물 104)·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보물 105)·
    법인국사보승탑비(보물 106) 등과 그 밖에 쇠로 만든 불상이 있다.

     

     

    보원사지에서 제일 처음 만나는 유적은 보물 103호 당간지주이다. 당간은 절에서 행사나
    큰 법회등이 있을때 당이라고 하는 깃발이나 괘불을 거는 깃대와 같은 것인데 당간은 대개
    나무가 재질이어서 남아있는 경우가 드물고 돌로 만든 당간지주만 남아서 전해진다.

     

    그러나 안성의 칠장사나 계룡산의 갑사처럼 철로 만든 당간이 아직 남아서 전해지는 경우도
    드물게 있다.

     

    당간 지주는 하부에 당간을 고정하는 둥근 홈이 파여져 있고 당간지주의 가운데 구멍이 있어
    가로로 당간을 고정하게끔 되어 있다. 당은 멀리서 그 절에서 법회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하므로 주로 절의 입구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간지주를 지나면 개울을 만난다. 제법 깊어보이는 계곡에는 아마도 석교가 있었던 듯 하다.
    이 절이 번성할때만 해도 결코 평화의 시대로 볼 수 없었을 것이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듯
    해자처럼 절 입구를 깊은 개울이 막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계곡을 가운데에 두고 당간지주와
    석조가 있다.

     

     

     

    석조는 보물 제 102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석조가 보물로 지정된 예는 흔하지 않다. 화강석의
    돌을 파서 만든 이 석조는 절에서 물을 담아 쓰던 용기이다. 아마도 이 절 앞길은 서해안의
    뱃길과 공주나 부여, 신라로 가는 육지길을 잇는 자리였었고 이 석조가 절문밖에 있는 것은
    지나는 길손들이 많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또 말이 주 교통수단이였던 당시에 절 입구에
    하마비(下馬碑)가 있었을 것이고 그 편의를 위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인쪽과 윗쪽만 세심하게 가공된것으로 보아 아마 땅에 묻어 두고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런 장식도 없지만 거대한 크기로 인해 웅장한 느낌을 준다. 안쪽도 아무런 장식도 없으며
    한쪽에 물을 내보내는 구멍만 있다. 현존하는 석조중 가장 큰 것이다.


    통일신라기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978년 (고려 경종 3년)에 제작된 법인국사 보승탑을
    비롯한 다른 석조물들과 관련시켜 볼때 고려전반기에 만들어 진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예전에는 석교가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몇개의 석재만 남아서 징검다리 역활을 하고 있는
    개울을 지나면 보원사지 5층석탑을 만난다.

     

     

     

     

     

     


    보물 제 104호인 이 5층 석탑은 통일신라의 양시과 고려초의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그래서
    통일신라이 기법을 계승한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추정이 된다고 한다. 높이 9미터의 이 탑은
    2층의 기단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리고 정상에 상륜(上輪)을 올린 일반형 석탑이다.


    기단부는 여러장의 판형의 석재로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 구성되어 있는데 기단의 면석에
    우주(隅柱)가 조각되어 있고 양각된 사자상이 있다. 하층기단 상면에는 두개의 우주가 모각
    되어 있고 탱주로 양분한 각면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의 조각이 있다. 이중 사자상과 상층
    기단의 팔부중상과 천수상(千手相)에서도 통일신라의 양식이 나타난다.


    탑신은 하나의 돌로 탑신석을 조성하였다. 옥개석은 아랫면에 4단의 받침을 조각하고 있는데
    옥개석은 백제탑 계통의 양식을 따랐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보원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사찰이였는데 고려 초기에 중창되었다고 한다.그때 이 석탑도 같이 조성된 것 같다.

     

     

    최근에 서산시의 요청으로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중인데 금당자리를
    추정할 수 있는 불상대좌의 기단부가 발견 되었다.


    5층석탑 주변에서 금당으로 추정되는 조선시대 대형 방형 건물지(한변 21.8m)의 흔적과
    고려시대에 축조된 'ㅁ'자형 건물터 2기(남북 10.2m, 동서 17.3m), 그리고 'ㄱ' 자형 건물지
    1동과 담장지 등이 같이 발견 되었으며 온돌의 흔적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번 조사 결과 '普願寺三寶'(보현사삼보)라는 명문이 있는 암키와와 용(龍) 무늬를 도안한
    암막새, 청동정병과 같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 중 '普願寺三寶'라는 명문 자료로 보아서
    삼보전이라는 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용 무늬 암막새는 용 꼬리가 드러난 부분의
    뒷면에 고려 제2대 '혜종'(惠宗)으로 추정되는 문구가 들어간 명문자료가 있어서 이 절이
    고려 왕실의 왕사와 국사를 배출한 중요한 사찰이라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다.

     

     

     

     

     

     


    보물 제 105호인 법인국사 보승탑( 法印國師 寶乘塔)이다. 높이 4.3미터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탑은 법인국사의 사리를 모셨다. 975년에 건립된 부도탑이다.


    법인국사는 신라말에서 고려초의 고승으로 법호는 탄문이다. 900년에 출생하여 15세때에
    장의산사에서 계를 받았고 968년( 고려 광종 19년)에 왕사로 임명되었다가 974년(광종25)
    국사가 되어 975년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 당시 광종의 지시로 부도를 국가에서 세웠다.


    이 탑은 팔각원당형의 형태인데 중대석의 조각이 매우 아름답다. 그리고 상대석에 난간을
    두른 형태는 보기드문 형태이다.옥개석은 3단이 받침과 추녀와 서까래가 날렵하다.

     

     

     

     

    보물 제 106호인 법인국사 보승탑비 (法印國師 寶乘塔碑)이다. 법인국사가 열반한지 3년이
    흐른 후 새로 임금이 된 경종의 지시로 978년(고려 경종3년) 세워졌다. 비의 높이만도 2.3m,
    폭 1.15m, 글자수가 5,000여자에 이르는 아주 큰 비이다. 나라에 소속된 공장(工匠)들을
    파견하여 세우게 했다. 비문의 내용은 법인국사 탄문스님의 일대기를 새겼다.


    역대 왕들과 가가운 사이였으며 국가가 시행하는 각종 불사를 도맡아 했고 특히 광종의
    왕권강화 기간동안 정신적 지주로써 활약했다. 학승으로 제자들이 많았던 모양인지 말년에
    보원사로 올때 승려 천여명이 영접했다고 한다. 이곳을 고산(故山)이라고 한것으로 보아
    어렸을때 법인국사가 수련했던 곳으로 보인다.

     

    까치밥 하나도 남겨지지 않은 감나무 몇 그루가 외롭게 서 있다. 며칠전에는 눈 송이들이

    소담스레 어깨위에 손님으로 왔다가 가버린 지금..그저 오후 3시의 권태에 지친 햇살만

    잠깐 가지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다.

     

     

    예전에는 중국으로 가거나, 아니면 중국에서 오는 장시치들과 관료들이 지나쳤을 길이다.

    길이란 사람이 다니기에 가장 편한 곳으로 뚫리게 마련이니 지형이 변하지 않는한 좀체

    변하지 않는 법이다. 석조와 당간지주 사이에서 바라보는 저길은 가야산의 가장 낮은

    고개를 지나 계곡을 타고 서해안으로 나가는 길이다.

     

    아마도 천년전에도 체부가 지나가는 저 길로 말을 타고, 혹는 걸어서 갔을 것이다.

    따스한 오후의 겨울 햇살을 받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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