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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9일 오늘의 역사오늘의 역사(歷史) 2006. 12. 18. 22:45
12월 19일 오늘의 역사
국내
1136 묘청의 난 끝남
1888 독립운동가 소해 장건상 출생
1900 독일인 에케르트 초청, 군악대 편성, 설치령 반포
1927 만주군벌 장작림, 재(在) 만주교포의 축출을 명령
1932 윤봉길, 일본 오사카 형무소에서 순국
1945 임시정부 환영 전국대회 개최
1968 대학입시예비고사 첫 실시
1980 중앙정보부를 81년 1월 1일부터 국가 안전기획부로 개칭키로 결정
1987 남극 킹조지섬에 세종과학기지 기공식
1992 김대중, 대통령 선거패배로 의원직 사직및 정계은퇴 선언
1995 국회, 여야 합의로 5.18 특별법 제정
2002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노무현 후보 당선2007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당선
해외
1036 중국의 시인 소동파 출생
1877 에디슨이 축음기 발명
1906 소련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태어남
1946 인도차이나 전쟁 발발
1948 영국의 소설가 에밀리 브론테, 30세로 요절
1965 드골,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
1984 영국과 중국, 홍콩반환협정에 조인
1986 소련,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7년간의 유배를 해제
1998 클린턴 미국대통령에 대한 성추문관련 탄핵 결의안, 미하원 본회의 통과
2001 아르헨티나 비상사태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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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선생이 단군이래 가장 큰 사건이였다고 평가했던 묘청의 난이 1136년 오늘
완전히 종결되었다.
묘청이전에 고려가 성립할 당시부터 개성을 기반으로 한 호족출신인 왕건은 북벌주의자
였던 궁예와 잦은 의견 충돌끝에 집권하게 되면서 남방세력인 삼한을 통일해야 한다면서
남쪽영토에 집착했다.
왕건의 이러한 삼한위주의 정책은 고려 내부에는 반도사관을 가진 무리와 대륙회복 지향의
두 무리로 갈라지게 되었고 반도사관쪽의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를 집필하면서 신라를
지나치게 미화하여 고구려를 비하하였으며 중국에 항전했던 고구려의 기상을 덮기 위해서
삼국통일이라는 모토를 내세워 김춘추와 김유신을 미화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반도사관에 반기를 든 사람이 일연스님과 고려 인종때의 묘청(妙淸)스님이였다.
역사라는 것이 늘 승자의 입장에서 쓰여지다 보니 우리가 배운 역사에서는 묘청은 요승
이며 '묘청의 난'이라고 비하되어 있다. 이것은 고려사를 쓴 정인지의 역사를 보는 눈이
사대사상이 막 물들어가는 유학자의 좁은 눈이기도 하지만 현재 일본 식민사학자로부터
학문을 전수받은 우리 역사학계의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의 숭불정책(崇佛政策)으로 인해 묘청도 그 당시 사회에서 높은 인망(人望)을 얻었고
인종 시대에 이르면 묘청은 왕으로부터 깊은 신망을 받게 되었다. 그는 왕을 알현할 때마다
송도(松都)는 이미 왕기(王氣)가 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옛 영토를 찾는다는 점에서
보더라도 모름지기 도읍을 서경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고, 인종도 묘청의 그와 같은
주장에 대해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인종은 일년 중의 며칠은 평양의 서궁(西宮)에 머무르면서 북방 백성들을 어루만지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몸소 행차할 형편이 되지 못할 경우에는 몸이
가는 대신 자신의 옷을 보내어 왕의 기운을 서경에 심으려고 했다.
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자 묘청은 도읍을 서경으로 옮길 것을 적극적으로 권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묘청의 이같은 생각은 송도의 유생들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된다.
그들은 묘청이 서경에서 태어난 인물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가 지방색 때문에 서경 천도를
주장한다고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이같은 반대에 부딪히자 묘청은 천도를 위해서는 묘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종 10년이 되던해에 왕이 서경에 행차를 하는 기회를 타서 묘청은 비밀리에 커다란 떡을
만들고 그 속에 기름을 넣어 대동강 물 속에 집어넣었다. 시간이 지나 떡의 기름이 물위로
떠올라 영롱한 빛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왕에게 상소를 올려 대동강에 서기(瑞氣)가 피어오르고 있으니 금(金)나라를 공격
하면 승산이 있을 것이며, 중국의 천자처럼 고려의 왕도 황제라는 칭호와 중국의 연호를
버리고 우리연호를 쓰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곧이어 대동강에 피어오른 서기(瑞氣)라는 것은 거짓임이 발각되었으며 이때부터
묘청의 계획은 반대세력의 거센공격을 받게 된다. 초조해진 묘청은 결국 인종 13년(1135)에
서경을 근거로 하여 정지상(鄭知常), 조광(趙匡), 유참(柳\), 조창언(趙昌言) 등과 더불어
반역을 일으켰다. 나라 이름을 대위(大爲)라고 부르고 연호를 천개(天開)라 불렀다.
묘청은 사대주의자인 김부식이 이끄는 정부군의 공격을 받고 고전하던 중 부하 조광의 손에
죽임을 당함으로써 신채호(申采浩)가 이른바 ‘朝鮮史 一千年來 第一代 事件 ’이라고 평가한
사건이 막을 내렸다.
만약에 김부식이 지고 묘청이 이겼더라면 우리는 대륙국가로써의 웅지를 고스란히 지키고
있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김부식이 이김으로써 소위 말하는 유학자의 입김이 세어지게되고
그들은 중국에 대한 모화사상으로 민족을 이끔으로써 적어도 우리역사가 천년은 후퇴했다
라는 것이 단재 신채호 선생의 평가이다.★
1932에는 윤봉길의사가 일본 오사카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일본군들은 윤봉길 의사를 총살
로 형을 집행한뒤 그 시신조차도 인근 쓰레기 하치장에 암매장하는 비겁한 짓을 저질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는 일본군이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상하이사변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졌다.
이 의거로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 거류민단장 가와바타등 두명이 즉사하고,
일본 제3함대 사령관, 9사단장등 군수뇌부 10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반인 장졔스는 '중국군 100만 대군이 이루지 못한 일'
이라고 치하했고 우리의 임시정부에 대해 전폭적 지원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초 일본군은 윤봉길을 훙커우 공원에서 공개처형하려 했으나 자칫하면 국제적인 영웅으로
떠오를 수 있고 그로 인해 국제여론이 비등해질 것을 우려, 일본 내 처형을 결정했다.
시신은 광복 후인 1946년 5월 순국 14년 만에 봉환돼 효창공원 묘소에 안장됐다.★
오늘 치루어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일찌감치 한나라당 후보로 선정되어 활동한
이명박 후보가 역대 최대의 표차로 당선이 확정되었다. 역대 최저의 투표율이라는 또 하나의
기록도 세운 이날 대선은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를 계속한 후보가 당선되어 예전의 선거에
비하여 국민적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이념과 지역대결 구도라는 걸림돌에서 해방된 국민들은 당연하게 실리를 택한 선거였다.
그러나 패배한 여당에서는 계속 수구와 보수 대 진보의 대결로 몰고 가려한 것이 가장큰
패배의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민주노동당도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는데 이것은 국민들의 사고가 분배에만 지나치게
치중하는 노동계에 던지는 매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국민들은 분배에 앞서 몫을
키우는 일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반증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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