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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월 17일 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歷史) 2006. 11. 17. 10:05

     

     


    11월 17일의 지나간 오늘


    국내
      1448(조선 세종 30)  <동국정운> 반포
      1895(조선 고종 32)  음력 폐지하고 양력 사용
      1905  을사보호조약 체결 조인   
      1906  위정척사 사상가 최익현 대마도에서 별세
      1932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세상 떠남
      1962  일본서 반환한 문화재 152점 공개
      1994  김영삼 대통령, 시드니에서 세계화구상 발표

     
    해외
      1869  수에즈 운하 개통
      1887  영국 장군 버나드 몽고메리 태어남
      1917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 사망
      1969  미국과 소련간의 전략무기제한협상(SALT), 헬싱키서 개막
      1970  소련 무인우주선 루나 17호, 달에 착륙
      1971 국제노동기구(ILO), 자유중국 축출하고 중공 가입 가결
      1980 중국 공산당, 공자 복권


    --------------------------------------------------------------------------



    우리나라 글이 한글이전에 가림토문자가 있었다고 하지만 전해지지 않았고 조선의
    세종조에 와서야 한글도 만들어지고 중국의 한문을 어떻게 발음하는지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 졌는데 '동국정운'은 세종의 이런 노력에 대한 결과물이다.


    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 등이 편찬한 최초의 한자 음운서인 6권6책의 활자로 된
    이 책은 간송미술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은 국보 71호, 건국대 박물관본은 국보 142호로
    지정되어 있다.


    역시 우리나라 최고액 화폐에 초상화가 오를만 하시지~



    101년전 오늘에는 온 나라의 백성이 분노에 떨던 날이였지. 일반 백성들이야 잘 모르니
    그다지 저항이 있지는 않았던것 같았지만 대한제국이 망국으로 가는 첫걸음이였다.


    300년전 조선수군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했던 일본의 수군은 동안의 절치부심을 딛고
    이순신 장군의 학익전 전법을 변용하여 1904년 러시아와의 한판 싸움에서 승리를 하고
    마침내 동양의 패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자 일본은 조선을 통째로 손아귀에 넣고자 계략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 첫번째가 군대를 해산시키고 고종을 협박하여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란 ‘한국은 자주적으로 외교업무를 담당할 만한 능력이 없으니
    일본의 보호를 받는다’는 취지로 일본정부가 조선 정부의 외교를 관할한다는 내용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수차례에 걸쳐서 황제를 알현하며 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였지만 끝내 이를
    승낙하지 않자 을사오적이라 불리는 대신들을 모아 체결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마침내 11월 17일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 학부대신 이완용,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의 찬성으로 조약이 이루어 진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 대사와 박제순이 체결한 5조항은 황제께서 처음부터 승인한 것이
    아니며 국새를 찍지도 않으셨음. (중략) 일본의 외교권 늑약도 근거 없는데 하물며 내치상에
    1건이라도 어찌 인준하겠는가. (중략) 황제께서는 세계 각 대국이 한국외교를 향후 5년간 함께
    보호하기 원하심."


    이것은 고종 황제가 을사보호조약이 무효임을 밝히기 위해 각국에 보낸 밀서의 내용이다.
     

    고종 황제의 특사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과 국무장관을 만나기 위해 급하게 파견됐던 미국인
    호머 헐버트(1863~1949) 박사는 대한제국 황제의 국새가 찍힌 위탁 밀서를 품에 안고 자신의
    모국을 방문했지만 미국정부의 의도된 거부로 전달조차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그는 그 뒤로도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탈리아, 벨기에, 중국 등을 오가며 황제의
    밀서를 전달하려 했지만 약소국의 항변은 무시되고 말았다.
     

    특히 미국은 1905년 7월 29일 '태프트-가쓰라' 밀약으로 필리핀 지배에 대한 일본의 양해를
    얻고, 대신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용인 했던 터라 1882년 조-미 수호조약의 '알선조항'
    (상호방위조약)을 무시하고 대한제국을 배신했다.


    우리가 새겨야 할 교훈 셋


    하나) 그러게 미국놈 믿지 말라 했지!(지금도 마친가지삼)


    둘) 잊지말자, 을사오적~ 그 후손들 지금도 잘먹고 잘 산다지? 됴카튼 세상...


    셋)조약은 무신....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은 일본과 친일파가 만든 것이다. 게다가 조약
    이라는 것은 두나라가 또는 여러 나라가 평등한 입장에서 자의에 의해 맺는 것이다.
    일방적인 이것의 명칭을 "을사늑약"이라고 해야하고 그렇게 가르쳐야 한다.

     


    최익현[崔益鉉] 이라는 한말의 유학자가 일본의 쓰시마 섬[對馬島]에서 한많은 생을
    마감했다.1833(순조 33)년 12월 5일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나 격변의 세월동안 벼슬살이를
    했다. 호는 면암(勉菴)이다.


    그는 위정척사의 학자로 대표된다. 외국과의, 그중에서도 일본과의 통상을 여는 화의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린것이 계기였다. 이는 자신이 정면으로 공격했던 대원군의 쇄국과
    의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으므로 조선이 쇄국으로 인해 멸망의 길로 가는데 있어서
    일조를 했다는 비판을 받을만 한 일이다.


    그의 위정척사론이 담긴 상소를 보면  첫째, 일본과의 강화(講和)는 일본의 위협에 굴복
    하는 것으로, 무비(武備)를 갖추지 못하여 고식책으로 강화를 추진한다면 앞으로 적의
    무한한 탐욕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며, 둘째, 일본의 물화(物貨)는 모두가 요사기완(搖奢
    奇玩)으로서 우리나라의 유한한 농업생산품으로 적의 무한한 공업생산품과 교역하게
    되면 반드시 경제적 파탄을 초래할 것이며, 셋째, 일본을 왜(倭)라고 일컬었으나 실은 양적
    (洋賊)과 다름이 없는 것이니 일단 강화가 성립되면 금수와 같은 양인(洋人)의 사교(邪敎)가
    들어와 우리의 전통적 질서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이유로 일본과의 강화를 극력 반대했다.
    그는 이 상소로 한때 흑산도에 유배되기도 했었다.


    그는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농민군을 약탈·잔학행위를 일삼는 집단으로 간주하고
    격렬히 비난하기도 했다. 갑오개혁도 그는 격렬히 반대해서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등
    개화파의 처단을 주장하기도 했다


    1898년에 그는 조정에 12조의 시무책을 올렸는데 여기서 그는 강렬한 화이관(華夷觀)과
    양이주의(攘夷主義)의 입장에 서서 갑오개혁을 부정하고 구래의 봉건적 지배체제의 회복을
    주장했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사대에 젖어 있던 대표적인 유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1월 29일 〈청토오적소 請討五賊疏〉를 올리는 등의 상소
    운동을 하다가 실패하자 전라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키게 된다.  태인읍을 무혈점령하고
    그곳의 무기와 세금을 접수해서 정읍,순창등을 거치는 동안 의병의 수가 500명에 이르렀다.
    곡성을 거쳐 다시 순창으로 돌아 왔을때는 의병수가 900명에 무기도 많이 보강되었다.


    그러나 전주관찰사 한진창(韓鎭昌)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포위공격을 받아 임병찬등 12명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임병찬과 함께 쓰시마 섬[對馬島]에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단발을 강요당하자 단식했지만 단발조치가 철회되자 단식을 중지했으나 그해 11월 병을 얻어
    12월 30일 순국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가 애국지사임에는 분명하지만 절의로 단식을 해서
    죽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단발에 대한 항의..즉 자신이 지키는 관습에 대한 저항이였고
    그 후에 단식을 중단했지만 병으로 인해 삶을 마감했으므로 병사를 한 것이다.


    매천 황현선생이 저술한 매천야록에 최익현 선생에 대한 기록이 있다.


    최익현은 평소 중망이 있었고, 충의가 일세에 뛰어났다, 그러나 군대를 부리는 데 익숙하지
    못하고, 나이 또한 늙어서 일찍이 기모(奇謨)가 있어 승산을 계획했던 것이 아니며, 수백명의
    오합지졸은 모두 기율이 없고 (중략) 보는 사람들은 이미 반드시 패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매천야록, 331쪽)


    11월 17일, 전 판서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사망하였다. 최익현이 처음 도착하니,일본 좁쌀로
    지은 죽을 바쳤으나 물리치고 먹지 아니하니, 왜인은 크게 놀라며 우리 정부를 통해서 음식물
    을 공급받았다.(매천야록, 341쪽)


    명분에 목숨을 걸고 살다간 선비... 그 꼬장함은 마음에 든다. 꼬장함이 없는 시대니~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말이 있다. Noblesse Oblige는 `높은 신분일수록 더 많은 사회적인
    책임을 져야한다`라는 뜻이다. 그말에 딱 맞는 사람으로 나는 세사람을 드는데 경주 최부자,
    백산 안희제 선생, 우당 이회영 선생이다.


    그 우당(友堂) 이회영 선생이 다롄의 감옥에서 옥사한 날이다. 그는 물려받은 많은 재산을
    교육사업과 독립운동에 사용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듬해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전덕기(全德基)·양기탁
    (梁起鐸)·안태국(安泰國)·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 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교육사업에 힘쓰다가 일본의 감시가 심해지자 만주로
    망명하여 해외항일투쟁을 계속했으며, 1920년대 이후에는 무정부주의 운동에 투신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상하이에서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하여 의장에 추대되었으며
    행동강령으로 일본군기관 및 수송기관 파괴, 일본요인 및 친일파 숙청, 일본외교기관 폭파 등을
    결정했다. 1932년 중국국민당과 교섭하여 자금과 무기지원을 확약받았다.


    같은 해 11월 만주의 연락근거지 확보와 지하공작망 조직, 주만 일본군사령관 암살 등을 목적으로
    다롄[大連]으로 가던 도중 밀정 연충렬과 이규서의 밀고로 다롄의 일본경찰에 잡혀 고문 끝에
    옥사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나라가 망하는 것은 늘 외부의 적보다는 내부의 아군에 의해서 이다 (반디불 생각~)



    요즈음 우리나라에도 운하 논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딴나라당의 모 대선주자(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니 자칭이다.)가 대한민국을 가로로 세로로 운하를 놓겠다고 한다.


    며칠전에는 조선일보에 이규태 코너의 뒤를 이은 코너에 글을 연재하는 사람은 중국의 산동반도
    부근에서 인재가 많이 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강들이 서쪽으로 정기를 뿜어내고 있고
    그로 인해 그 정기를 먹은 산동반도에서 인재가 많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북으로 운하를
    만들어 그쪽으로 정기를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 말을 그대로 믿으면 결국 운하로 인해서 강물들은 남으로 달리게 될것이고 이번에는 남쪽의
    일본에서 인재가 많이 날것이 아닌가?


    수에즈 운하는 제국주의의 산물이다. 프랑스의 외교관 레셉스가 이집트의 왕 사이드 파샤를
    설득하여 1854년부터 69년까지 16년이 걸린 대공사를 했다. 홍해와 지중해를 직접 연결하여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가장 가까운 항로다.


    당시 유럽은 아시아에 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고 계속 개척중이기도 했다. 식민지에서
    수탈한 많은 경제적 가치들을 본국으로 신속하게 운반할 필요가 있었고 그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수에즈 운하이다. 그러나 수에즈 운하를 가진 이집트는 그 덕을 못보고 아직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

     

    프랑스는 이 수에즈 운하를 통해서 도둑질한 물건도 주로 운반을 해갔다.
    프랑스 루부르 박물관 수장고에 있는 우리들의 문화재도 아마 그곳을 통해서 갔겠지~



    조각가 로뎅도 이날 세상을 떳다. 그의 생각하는 사람, 청동시대, 칼레의 시민등은 유명하다.
    생각하는 사람은 무었을 생각할까? 그것은 조각가만이 알 일이지...
    보통의 사람들도 다 알 수 있으면 그게 예술인가? 마네킹이지..나에겐 마네킹도 예술로 보여.

     

    꽁츠~

     

    조선 5백년동안 한민족을 쪼그라들게 만든 정신적 기반을 제공했던 공자(孔子)를 중국 공산당

    에서 복권했다. 그러나 지금 중국에서는 노신(루쉰(魯迅))과 공자(孔子)를 두고 누가 중국정신의

    대표자인지를 두고 설왕설래를 거듭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공자의 학문은 지배자를 위한 학문이다. 권력을 어떻게 창출하며 그 권력을 지키는데 있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학문이다. 그가 주장하는 인(仁)과 의(義)는 모두

    백성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가져야 할 덕(德)이라는 귀결에 도달한다.

     

    결국 그의 학문은 사실 그의 나라였던 중국에서도 버림받았지만 그의 정신을 계승한 것은 오히려

    동쪽의 변방인 조선이라는 나라였고 그 조선에서 5백년 동안 정치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실리보다는 명분에 목숨을 걸어야 했던 그의 학문이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이야 말 안해도~

     

    중국이 세계앞에 옷을 벗고 나설려리 무언가 중국적인 것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번 공자의 복권도

    필요에 의한 것이리라 생각된다.

     

    이제는 우리가 공자를 버려야 할 때가 아닌가?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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