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 달 뜨는 배밭작은詩集 2006. 2. 21. 23:00
달이 뜨는 배밭/ 김대근
출근길 사과밭, 퇴근길 배밭
하얀 꽃들 다투어 친구가 된다
스멀스멀 피어나는 아침 안개는
추억 한 페이지 투영되는 스크린
핏덩이로 절 문앞에 버려진 아이
일찍 온 사춘기에 삭발 무서워
도망 나와 웅크렸던 배밭 속 회색 옷
마주친 눈 그렁그렁 맺힌 눈물에
달빛이 비쳐 배꽃에 반짝거렸지
대빗자루 붓 삼아 마음 그리던 스님
눈인사에 목례로 넘기는 걸음 비척이더니
약숫물에 떫은 맛이 난다
돌아오는 길, 반쯤 열린 사천왕문 사이로
승복 자락 넘겨보다 얼른 배꽃을 본다
세월의 지우개도
미처 지우지 못한
저릿하게 가슴 우리는 배밭 속 달
올해도 배꽃과 함께 피었다 진다*******************詩作 Note ************************************
내가 사는 아산…, 그리고 옆 동네 예산에는 사과 밭, 배 밭이 많다.
요즈음은 사과꽃, 배꽃들이 아침과 저녁의 출퇴근 길에 벗이 되어 주고는 한다.자연이란 좋은 때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아침이면 아침대로 스멀스멀 피어나는 안개가 좋은 때가 이 즈음이고
저녁에 조금 늦게 회사에서 나오다가 달빛 아래 하얗게… 아니 차라리
창백하게 피어있는 배꽃이나 사과꽃을 보는 것도 좋은 때이다.내가 살던 구포…. 시장 쪽에서 백양산 쪽으로 대리라는 동네가 있었다.
그곳에는 배 밭이 몇 개 있었는데 전국적으로 알려진 구포 배는 실상은
김해에서 생산이 대부분 되었고 몇 개의 과수원은 그 생산량이 적어서
겨우 구포 장에서나 명맥을 이을 뿐이었다.그 대리 쪽으로 가기 전에 다니던 학교 옆 백양산 쪽으로 이주민 촌이
하얀 슬레이트 지붕을 이고 군락을 이루고 있었는데 우리는 새 동네라고
불렀고 그 동네를 가로 질러 산길이 시작되는 곳에는 배 밭 하나와
바로 앞에 우리 밭이 있었다.
우리 밭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산소가 두 개 나란히 있었는데 한 번도
자손이 찾는 법이 없어서 밭을 갈 때도 행여나 동티라도 날까 조심해서
산소를 피하곤 했고 벌초도 빠지지 않고 했다.우리 밭과 배 밭 사이로 산길이 주욱~ 나 있었는데 한참 산을 오르면
물이 좋은 계곡을 하나 만나고 다시 길을 산으로 잡으면 삼거리가 나왔다.
오른쪽으로 오르면 약수터로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계단 길을 밟으면
비구니(여승을 불가에서 이렇게 부른다.) 스님이 주인인 절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냥 엄정골 절…. 이렇게 부르기를 좋아했다.
그 이유는 학교 뒷동네에 엄정골이라는 동네에서 오르는 길이 제일 가까워서
아마도 그렇게 부른 듯하다.같은 6학년 졸업반에 그 절에서 어릴 때 절 문앞에 버려져 키워진 아이가 있었다.
얼굴 넙데데 한 그 여자아이는 주지스님과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머리를 깎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고 하였다.우리 집은 학교 담 밑에 있었다.
학교 담과 콘크리트 길, 그리고 우리 집의 탱자나무가 붙어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학교 사택에 사셨는데 사택의 단칸방에서 아이들 둘과 사모님
그렇게 네 식구가 살고 계셨다.
선생님은 급한 일이 있을 때는 제일 가까운 우리 집에 자주 오시곤 했다.
어렵게 학기초에 한번 가정방문을 하시고 나서 생긴 변화의 하나였다.졸업을 앞둔 며칠 전이였을 것이다.
테레비전도 라디오도 없는 집이라 일찍 잠자리에 들었든가 보다.
늦은 밤에 선생님이 오셨다. 큰 방에서 아버지와 엄마는 황망히 손님을 맞고
나는 온통 기워진 내복이 부끄러워서 작은 방에서 그냥 자는 척을 했다.
조금 후에 엄마가 큰 방과 작은 방을 구분하는 유일한 경계선인 문을 열고
흔들어 깨웠다.
못 이기는 척 일어나 선생님께 인사를 하는데 낯익은 여자애가 실풋 웃는다.졸업을 하면 머리를 깎아야 하는 게 너무 싫고 무서워서 도망을 했단다.
갈 곳이 없어서 학교로 들어와 교실 앞에 있는데 저녁이 되니 대숲에서 무언가
뛰쳐나올 것 같고 바람소리 휘르르~거리니 어쩌랴… 사택의 문을 두들긴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의 사택은 단칸이니 한참을 달래서 내일 절로 다시 올라가겠다는
다짐을 받고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오신 것이다.
그날 밤 안 보여줄거 다 보여주었다. 여기저기 기운 내복, 종이에 골탕을 입히고
모래를 뿌린 종이지붕, 국제신문으로 도배를 하고 콩기름을 입힌 방바닥…
내가 가진 치부라는 치부는 다 보여준 것이다.그리고 얼마 후에 졸업을 했다.
목에 후크가 있는 까만 교복에 까만 모자를 멋스럽게 쓰고 시내버스를 타고 한참
가야 하는 중학교에 갔다.
새로운 생활에 젖어 들고 있을 무렵…
아마 4월 하순 쯤이었을 것이다. 그때도 배 밭에 배꽃이 피었던 때였으니 말이다.그때도 밤이었다. 중학생이 되었다고 무슨 문학 전집을 읽느라고 잠들지 않은 꽤
늦은 밤에 또 선생님이 방문을 하신 것이다.
이번에는 엄정골절의 스님도 함께였다. 내용인즉슨 머리는 어찌 깎았는데 한동안
울고불고 하더니 절을 나가서 밤이 늦어도 소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디 아는데도 없는 아이라 선생님께 왔노라는 말씀이셨고 아버지는 동네 어른들,
얼굴을 아는 나…. 그렇게 그 밤에 절 주변을 뒤졌다.
지금이야 112나 119에 신고를 하면 될 것이지만 그때는 그런 것도 몰랐다.아마도 그 밤에 족히 몇 킬로쯤은 걸었을 것이다.
엄정골절에서 우리 밭과 배 밭을 지나 야시고개라 불리는 곳까지 훑었지만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터덜터덜 어른들을 따라 다시 엄정골절을 가기 전 우리 밭과 배 밭 사이를 지나는데
뇌리에 스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나는 장남이라 학교가 파하면 밭에 돌을 주워 내던지 고추밭에 재를 내던지 자주
밭에 나가 일을 했는데 그렇게 밭일을 하고 있을 때 그 아이는 어디서 놀다가 오는지
가방을 들고서는 밭을 지나쳐 가곤 했다.
우리 밭과 배 밭의 사이에 난 길을 가려고 하면 한참을 돌아가야만 하는 길이다.
그런데 가끔은 배 밭 울인 탱자나무가 느슨한 곳으로 쏙~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때는 지름길이겠거니 지나쳤는데 갑자기 그 생각이 난 것이다.그래서 살금 목을 집어넣고 살펴 보는데 저쪽 고랑에 무언가 얼핏 보였다.
그래서 "아부지예..잠깐만예~" 하고 두어 발 배 밭으로 들어가 보니 비료포대 하나 깔고
웅크리고 있는 회색 옷의 그 아이가 보였다.
나와 마주친 그 눈에서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있었다.
달은 또 얼마나 밝았던지…나는 뒤돌아 나왔다.
"아버지예...영순이 여 있심더...."어른들 손에 이끌려 가면서 자꾸만 뒤를 돌아다 보던 그 아이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스무 살 무렵엔 아침에 운동 삼아서 약수터에 다녔다.
한번은 일찍 약수터를 오르는데 계단을 대나무 빗자루로 쓸던 스님이 눈인사를 했다.
나도 그냥 가벼운 목례를 남기고 오른쪽을 길을 걷다가 그때서야 생각이 났다.
돌아오는 길에 열린 일주문 사이로 넘겨 보던 그 모습에서 왜 그렇게 가슴이 아프던지…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이제는 얼굴조차 정확히 기억할 수 없다. 다만 얼굴이 넙데데하다고 놀렸던 기억밖에는…배 밭에 배꽃이 필 때는 그런 슬픈 추억도 스믈스믈 내 추억창고를 기어 나오곤 한다.
'작은詩集' 카테고리의 다른 글
詩- 철쭉들 운다. (0) 2006.02.21 詩- 모란 진다고 서러워 마오. (0) 2006.02.21 詩- 찔레꽃 (0) 2006.02.21 詩- 장미 피다. (0) 2006.02.21 詩- 어부, 하늘 발길질 (0) 2006.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