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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모란 진다고 서러워 마오.작은詩集 2006. 2. 21. 23:12
모란 진다고 서러워 마오.
모란이 진다고 행여 슬퍼마오모란꽃잎 뚝뚝 떨어진 자리
내 마음 심어 둘테니
맹년봄 소쩍새 울 무렵
그 걸음 다시하시면
더 붉은 꽃닢 피워내리다.
(2005.5.8 김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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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행여 늦지는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작년에 보아둔 곳으로
모란을 보러 갔다.
아파트 화단의 모란은 이미 져버렸기에 뚝뚝 떨어진 설움만 보고 오는 것은 아닌지
하고 갔는데 정말 딱 맞춤으로 모란이 활짝 피었다.남들은 국화가 좋다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벚꽃이 좋다기도하고 또 어떤사람은
장미가 그중에 제일이라고 하지만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모란이 좋다.첫째는 자기를 애써 꾸미지 않는 꽃이다.
둘째는 벌과 나비를 꼬이려 향기를 품지 않는다.
세번째는 목련과 자꾸 이름을 헷갈리게 하여 나의 치매끼를 가끔 점검해 주기도 한다.
네번째는 질때 미련이 없다. 동백처럼 땅에 떨어져서도 며칠씩 꽃색을 간직하고 애처롭게
지나는 이의 발목을 잡는 그런 미련이 없는 꽃이다.
떨어지면 바로 땅으로 스며들고 마는 모란은 그래서 좋다.그러나 정말로 내가 모란을 퍽이나 좋아하는 이유는 신라의 설총이 지은
<화왕계(花王戒)>에서 ‘꽃들의 왕’으로 등장하는 모란 이야기에다가 <삼국유사>에 수록된
선덕여왕(善德女王)의 지기삼사(知機三事)에 대한 이야기에 모란꽃은 참 흥미있는 그런
꽃이로구나 생각해왔다.
조선 시대 때 시와 글씨와 그림에 모두 뛰어나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로
일컬어진 강희안(姜希顔)라는 선비의 꽃과 나무에 품계와 등수를 매긴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원예서인 <양화소록>에도 모란은 두번째의 자리에 매김하고 있다.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사군자에서 모란이 빠진 연유를 나는 이렇게 해석을
하고 싶어 지는 것이다.
이미 몇몇 글에서 느껴알 수 있듯이 나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 역사를 믿지 않는다.
힘이 있는 자와 권력을 가진자..그리고 부를 움켜진자가 마음대로 농단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어쩌면 역사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모란은 화려한 꽃이다. 그 모란을 수묵으로 그려놓으면 아무리 잘 그려 놓아도
역시나 실감도 없을뿐더러 그림의 테가 나지 않는다.조선의 역사는 가난의 역사다. 온나라가 가난에 찌들어 살았다.
몇십년 안정을 찾아서 부를 축적할 만하면 외적의 침탈을 받기도 했고 정통성이
없는 이성계 왕실은 중국에 돈으로 때워 정권을 유지해 나왔다.
어디 왕실과 고관대작의 주머니에서 그 돈이 나왔겠는가.
그것은 고스란히 허리굽어진 일반 백성들의 고혈과 울음과 설움들 이였다.
그러니 사회가 전체적으로 회색이였을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중국..일본..우리나라를 비교하면 수묵화가 돋보이게 된다.삼국유사에 나오는 선덕여왕(善德女王)의 지기삼사(知機三事) 이야기 좀 하자.
당나라 황실에서 선덕여왕이 결혼도 않고 혼자 산다고 은근히 놀리고 싶었던
모양으로 선물이랍시고 그림한점을 보냈다.
그런데 선덕여왕은 담박에 당나라에서 자신을 놀리려고 보낸 그림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삼국유사는 적고 있다.<선덕여왕은 어릴 적에 당(唐)나라에서 보내온 모란꽃그림을 보고 필경 그 꽃에
향기가 없으리라는 사실을 벌·나비가 그려지지 않은 데서 알아 차렸다. 함께 보내온
씨를 심었더니 과연 그러했다.>라고 한다.
탐화봉접(探花蜂蝶)이라, 꽃에는 으레 벌과 나비가 따르기 마련인데 그 그림에는
벌과 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았으니 향기가 없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으리라.여기서도 역사를 바로 읽어야 한다.
실제로 중국의 모란그림은 꽃과 나비와 벌이 함께 있다. 개업을 하는 집이나
신혼부부에게 이런 모란그림을 선물하는데 부귀영화를 누리라는 뜻이다.
선덕여왕의 이야기는 신하나 백성들에게 얕잡아 보이지 않으려는 고육책일것이다.조선시대의 강희안은 꽃의 아름다움보다도 꽃이 지닌 상징적 의미에 따라 품계를
정하였는데, 뛰어난 운치나 절개를 의미하는 매화·국화·연꽃·대나무를 1등으로 하고,
부귀를 의미하는 모란·작약·파초·해류(海榴) 등을 2등으로, 운치가 있는 치자·동백·
사계화(四季花=월계화, 장미의 일종)·종려·만년송은 3등으로, 소철·서향·포도·귤은
4등으로, 석류·복사꽃·해당화·장미·수양버들 등은 5등으로 분류하였다.
또한 진달래·살구·백일홍·오동·감 등은 6등으로, 배·정향·목련·앵도·단풍 은 7등으로,
무궁화·석죽·옥잠화·봉선화·두충등은 8등으로, 해바라기·전춘라(동자꽃)·금잔화·창포·
화양목 등은 9등으로 구분하였다.일년에 서너번정도는 서울의 인사동 나들이를 하는데 요즈음은 천안까지 수도권
전철이 들어와서 한결 서울 나들이가 편해졌다.
인사동에는 동양화 화랑도 많을뿐 아니라 골동상도 많아서 우리 민화가 제법 많이
나와 있는데 모란에 관심이 있는 고로 유심히 살펴보고는 하는데 모란꽃을 그린
병풍그림이 자주 보이는데 거의가 8폭 병풍이 주류다.
골동상 주인의 말로는 모란꽃 병풍은 옛날 마당에 차일을 치고 결혼식을 올릴 때는
빠질 수 없었다고 한다.민화들 중에서 가장 수효가 많은 화조도(花鳥圖)에는 대개 꽃과 암수 한 쌍의 새를
어울리게 해서 그리는데, 예를 들면 한 쌍의 새와 모란꽃을 그려 집안의 풍요와
부부 화합을 염원하는 뜻이 짙게 배여 있는 것이다.중국에서는 예로부터 모란을 꽃 중의 왕(花中王), 부귀화(富貴花)라고 칭할
만큼 크게 좋아하고 대접을 했다. 또한 은은한 운치가 있으며 귀인의 상을
지니고 있다고 하여 뭇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모란을 좋아하여 궁중에 심은 이래 상하가 모두 모란을 좋아했다고 한다.중국사람들의 전설에는 중국의 수양제가 처음으로 이 꽃을 세상에 전했다고
하기도 하며 중국의 국화(國花)가 지금은 매화이지만 그 이전에는 모란꽃이
었다고 한다.
중국 서부가 원산인 이 모란은 우리나라에서는 사찰이나 부잣집 정원에 많이
심다가 나중에는 분양(盆養)하여 널리 보급했다고 한다.옛날 신랑신부는 신방에 모란꽃 병풍을 치거나 베갯머리에 모란꽃을 그려 넣으면
부귀가 찾아오는 것으로 믿었기에 가끔씩 박물관에 들러서 옛벼개를 보면 대부분
옆에는 모란이 수 놓아져 있다.
아울러 왕실의 귀한 신분의 여인들의 옷에는 모란 무늬가 들어갔고 평민의 경우
일생에 단 한번 입을 수 있었던 신부의 예복인 원삼이나 활옷에는 모란꽃을 수놓았다.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이런 글이 있다.국화지은일자야 菊花之隱逸者也
모란화지부귀자야 牡丹花之富貴者也
국화는 사람으로 말하면 은자 같아서 고요하고 우아한 멋이 있고,
모란은 부자나 신분이 높은 사람 같아서 화려하고 의젓하다.
참 오래전에 정라남도 강진이라는 곳을 간적이 있었다. 강진리라는 곳은 겨울에는
파란 청보리밭이 좋은 곳이고 우리나라의 질 좋은 청자가 많이 만들어진 곳이다.
백제때는 일본으로 문물을 전해준 왕인박사가 첫 출발을 한곳이기도 하다.
번잡하지 않은 전형적인 시골의 안온함이 듬뿍 머금어진 강진에는 또 하나
불후의 명시(名詩)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노래한 김영랑의 생가가 있다.
마침 모란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생가뒤의 대나무가 소소소~ 성긴 바람소리를
내는 때였으므로 온 몸으로 전해지던 짜릿함을 잊을수 없다.
올해도 마음은 먹었건만 살기가 바쁜 탓으로 때를 놓치고 말았다.
가을에는 한번 가리라..강진의 푸른 하늘이라도 보고 와야지...
소위 학자라는 사람들..문학가라는 사람들..비평가라고 하는 찍어낸 두부모같은
헛깨비 글쟁이들이 이런 의미 저런 의미를 붙이곤 하지만 나는 아무런 생각없이
이 시가 좋을 뿐이다.
모란이 피기 까지는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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