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지리산 칠불사-구들박사가 그리운...
    여행기 2006. 6. 19. 01:52


    지리산 칠불사-구들박사가 그리운...

     


    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정수리를 따끈하게 덥히고 간간히 소낙비가 쏟아지기도 하던
    날씨속에서 광양에서 구례를 거쳐 오다가 칠불사라는 간판을 보고 10여년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가보았던 칠불사 기행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오랫만에 출장에서 돌아와서
    컴퓨터의 사진정리를 하다가 이제서야 올린다.


    지리산...어쩌고 하니까 감이 오지 않는 사람도 있을 터인데 하동 쌍계사하면 모르는
    사람이 드물것이니 이렇게 설명하자.
    칠불사는 하동 쌍계사로 가는 계곡을 타고 가다가 쌍계사입구를 지나쳐 아스팔트를
    따라서 계곡으로 한참을 외길로 올라가면 만나는 절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을 것이다. 이만하면 위치적인 설명은 충분하게
    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내가 20대의 혈기왕성한때에 터덜거리는 시외버스를 타고 쌍계사까지 와서 발바닥이
    부러틀 정도의 산길을 걷고 걸어서 와본적이 있는 곳이다.
    그것은 내가 김해김씨이기 때문도 아니고 무슨 명승유람에 목을 맨것도 아니였고
    단지 아자방(亞字房)때문이였다.


    당시에 석유파동이다 뭐다 해서 전국적으로 에너지 열풍이 불었었는데 어떤 책에서
    이곳 칠불사의 아자방이야기를 듣고 그 원리가 참으로 궁금했기 때문이였다.
    이 이야기는 좀있다가 하기로 하고 그 옛시절의 기억에 아련하던 지리산 골짜기의
    형태는 간곳이 없고 신작로가 나고 길이 넓혀지고 아스팔트가 깔려서 낯설다.


    지리산 반야봉 남쪽이 칠불사가 있는 곳인데 데쉬보드에 달아놓은 고도계가 가르키는
    바 해발 약 800m 고지에 자리고 있는 곳이다.
    이 칠불사(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소재)의 유래는 삼국시대
    (이건 잘못 되었다. 신라적인 시각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시대를 오국시대라고 부르기를
    즐긴다. 고구려,신라,백제,가야,왜..이렇게 5개의 나라가 한반도에서 자기 자리를 찾기위해
    쟁패를 겨루던 때였기 때문이다. 가야가 망하고 유민들이 왜와 합쳐서 일본에 정착하면서
    비로소 삼국이 되었다. 그러므로 가야가 성한시기는 우리나라의 오국시대가 분명한 것이다.
    -반디불생각-)
    초기 김해지방을 중심으로 낙동강 유역에 있었던 가야(伽倻), 일명 가락국(駕洛國)의 태조
    이자 오늘날 김해 김씨의 시조가 되는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일곱왕자가 이 곳에 와서
    수도를 한 후 모두 성불하였다고 해서 칠불사라 불리우고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와『동국여지승람 하동지』등에 의하면 수로왕은 서기 42년에
    태어 났으며  인도 갠지스강 상류지방에 기원전 5세기 부터 있었던 태양왕조 아유다국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아들여 10남2녀를 두었는데 큰 아들 거등(巨登)은 왕위를
    계승했고 차남 석(錫) 왕자와 삼남 명(明) 왕자는 모후의 성씨를 따라 김해 허(許)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나머지 일곱왕자는 출가하여 허황옥의 오빠인 인도스님 장유보옥
    (長遊寶玉)선사를 따라 처음에는 가야산에서 3년간 수도하다가 의령 수도산, 사천 와룡산
    등를 거쳐 서기 101년 지리산 반야봉 아래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더욱 정진, 수로왕 62년
    (서기103년) 음력8월 15일 모두 생불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들 일곱왕자들인 혜진(慧眞), 각초(覺初), 지감(智鑑), 등연(等演), 주순(柱淳) ,
    정영(淨英), 계영(戒英)은 성불한 후 각각 금왕광불(金王光佛), 금왕당불(金王幢佛),
    금왕상불(金王相佛), 금왕행불(金王行佛), 금왕향불(金王香佛), 금왕성불(金王性佛),
    금왕공불(金王空佛)로 불리워졌다.


    일곱 왕자의 성불 소식을 들은 수로왕은 크게 기뻐하여 국력을 기울여 그곳에 큰 절을
    짓고 일곱 부처가 탄생한 곳이라 해서 칠불사(七佛寺)라 불렀는데 이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졌다고 하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서기372년) 보다 약 270여년 앞선
    기록이다.


    가야가 망하고 반도를 풍미한 고구려,신라,백제의 자존심때문에 불교의 북방전래가
    학계의 기정사실화 되어내리지만 당시의 항해술로 보아서 인도로부터 가야에 이르는
    해로가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372년 북방전래설』은 중국을 통해 전해진 것임에 반해 이곳은 가락국이 바다를 통해
    인도로부터 직접 불교를 받아 들였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어 이와 같은 창건 설화를 지닌
    칠불사는 종래의 북방 불교 전래설과는 또다른 남방불교 전래설을 뒷받침 하는 것으로서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여러부분들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생각을 정리한다.


    첫째는 당시의 신흥국이던 가야의 권력구조의 개편에 있어서 불교의 크나큰 역활이다.
    당시 가야는 북방의 기마민족이면서 탁월한 제철기술자 그룹과 해상세력이던 토착민들
    간의 불화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인 제철기술에 밀려서 새로운 정치집단에 의해 열세에 몰린 해상세력
    들이 대거 일본이라는 신천지로 떠나버리자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새로운 해상세력을
    끌여들였는데 그 세력이 허황옥으로 대표되는 세력이다.


    그 세력의 지분정리가 김수로왕측은 왕이라는 지분을 허황옥측에는 왕자두사람의 성을
    바꾸어서 아마 내치를 담당한것이였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의 내각책임제쯤이 아니였을까하는 생각이다.
    그 다음으로 일곱왕자가 모두 불문에 귀의하였다는 것은 김수로왕측의 세력을 줄이기
    위한 고육책으로 쓰였을 것이다. 세력이 적은 허황옥측과의 동맹을 공고히 하기위하여
    김수로왕이 어쩔수 없이 택해야 했던 뼈를 깍는 고통의 결단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내가 주목하는 인물은 김알지라는 인물이다. 당시의 시대에서 김(金)씨는
    쇠를 다루는 제철기술자 집단의 자부심에 찬 성씨였다.
    아무나 함부로 도용할수도 없는 그런 성씨였다.
    삼국유사에 보면 김알지는 가야에서 도망쳐 온다. 김수로왕이 정병을 내보내 뒤쫒기까지
    한다.


    김알지는 가야 내부의 권력구도에서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던 김수로왕의 아들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어쩌면 강해지는 허황옥세력을 치기위해 친위쿠테타를 기도하다가
    실패하여 신라로 도망친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당시에 제철기술만 가지고 있으면 어디던 가서도 지도자가 될수 있었다.
    그래서 신라에서도 김알지는 왕으로 군림을 하면서 경주김씨의 시조가 된다.
    혹시 김알지의 반란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김수로왕이 타협의 대책으로 허황옥측과
    담판을 지은것이 왕위계승자 한사람과 허황옥측에서 내정을 담당할 두사람만을 남기고
    나머지 일곱왕자를 정치에서 완전히 격리 시킨것은 아니였을까..


    장유화상은 허황옥측의 사주로 일곱왕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책임을 맡았던
    것은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이다.


    역사에서 사라져버린 가야라는 나라에 대해 애착이 많은것은 내가 그 핏줄의 일부를 받고
    있다는 점도 있기는 하지만 우리민족 최초로 무당이라는 정신적인 지도자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벗어나 기술자가 다스리는 가장 현실적인 문명국이였다는 것이다.

    뛰어난 문명을 가졌다고 해서 강대국으로 살아남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역사가 말해주지만
    역사의 뒤안으로 숨어버린 우리민족의 선진 문명이 그리워서 이기도 하다.

     

     

     

    칠불사로 가는 길 일주문앞 주차장에서 알티미터가 해발 700을 가르키고 있다.
    여기서 100미터 이상 고도를 높여서 걸어야 하므로 칠불사는 해발 800정도 되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강원도를 제하고 나면 차로 해발 600을 넘는곳을 만나기란 쉽지않다.

     

     

     

     


    새롭게 현대적 공법으로 만든 일주문이다.
    통도사나 오래된 절의 일주문에서 주는 고풍스러움은 덜하지만 이 일주문 계단에 서서
    지리산 아랫동네를 내려다보는 경치는 가히 일품이다.

     

     

     


    야생화에 대한 지식이 없는데다가 나무이름 꽃이름 사람이름등에 대한 기억공간이
    적은 나는 대체로 이런쪽에 약하다.
    이름을 아는 꽃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니 말이다.
    칠불사로 오르는 길에 만난 이 아름다운 꽃 역시도 이름을 알지 못했다.

     

     

     


    칠불사...
    평소에 운동량이 적었던 탓에 겨우 몇백미터 걸음에도 숨이 차옴을 느낀다.
    이곳까지 올라와서 편하게 주차를 하는 사람도 있기는 한데 나는 어느절이든지
    가능하면 최대한 멀리 주차하고 절까지 도달하는 게곡이나 경치를 즐기는 편이다.
    칠불사도 아까 일주문밑에 차를 대고 십여분 걸으면서 지리산의 경치를 완상하는편이
    훨씬 멋있다.

     

     

     


    칠불사의 대웅전...
    그러나 나에게는 아자방이 주는 칠불사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대웅전보다 아자방으로
    마음이 쏠린다.

     

     

     

     


    지금은 새로운 선방을 만들어서 이런 풍경을 볼수는 없다.


    박사...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왕인박사처럼 당시 신라,고구려,백게,가야등에는 어떤일에
    일가를 이룬사람에게 붙여주는 칭호가 박사라는 호칭이였다.


    이곳 아자방은 구들박사가 놓았다는데 불을 한번때면 석달 열흘..그러니까 백일동안
    온기가 남아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효율적인 시스템인가 말이다.
    이걸 현대에 와서 복원한다고 헤쳤다가 그대로 수리후 덮었는데 예전의 효율성이
    없어여 버렸다고 한다.


    공학박사 여럿이 그동안 연구도 하고 했는데 짐작만 할뿐 그 원리를 정확하게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 아자방의 원리가 규명되어 오늘날 복원할수 있다면 아마 인류에게 복음이 되리라..
    특히 우리나라처럼 연료를 전량 수입해 써야하는 나라에서는 말이다.

     

     

     

     

     


    들어가 볼수도 없고 유리창을 통해서 들여다본 아자방의 모습이다.
    앉아보기도 하고 손바닥을 짚어보기도 하고 했으면 좋으련만 아쉬운 마음만 가득하다.

     

     

     


    일주문지나서 절이 도착하기전에 다신탑비와 영지를 만나는데 다신탑비는 지리산이
    우리나라 최초로 차나무를 심어서 차를 우리나라에 전한것을 기념하는 비이고 영지라는
    연못은 불문에 귀의한 일곱아들과 오빠인 장유화상을 보려고 이곳에 왔으나 장유화상이
    면회를 거절하여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는데 부처가된 일곱아들이 이곳에 비쳤다는 전설을
    간직한 무척 유서깊은 못이다.
    그 앞에 세월을 떠깨를 둘러쓰고 앉아있는 부도탑이 있다.

     


    부도는 우리 속가의 무덤이다.
    스님이 열반하면 화장을 해서 뼛가루나 유품등을 넣어서 무덤처럼 부도를 반드는데
    우리나라 토속신앙을 불교가 수용한것이라고 하겠다.
    불교의 입장은 이런 유믈이나 흔적조차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살이가 하나의 거품인데 톡~하고 터지고 나면 허무밖에 더 남는가 말이다.
    무던이나 부도나 모두 결국은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위안거리로 만드는게 무덤이고 부도고 납골당이고 그런 것이다.

     

     

     

     

    칠불사에서 만난 계곡의 청아함...
    하~후~ 세상의 찌든 때묻은 한숨만 뱉어놓고 왔다.

    '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해는 가을을 앓고 있습디다..  (0) 2006.06.19
    지리산 문수사-가을에 추천..  (0) 2006.06.19
    호미곶의 밤나들이  (0) 2006.06.19
    바다 가운데 서다...대호방조제에서  (0) 2006.06.19
    안압지의 밤풍경  (0) 2006.06.19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