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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엽주 名人을 뵙다..
    아산소식 2006. 5. 30. 13:54

     

    연엽주 名人을 뵙다..

     


    충남 아산군 송악면 외암리 민속마을 내 '이참판댁 가양주'로 더 잘 알려진 도무형
    문화재 11호 연엽주는 원래 대궐에서만 사용되던 주와 차의 성격을 함께 가지고 있는
    궁중음식이 었다고 한다.

     

     


    특히 예안 이씨 집안은 이 술이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 궁중용인 것을 감안, 집안
    에서도 제수용으로만 쓰도록 해 일가친척들도 음복할때 외에는 맛볼 수 없도록
    한 귀한 술로 여기고 있다.

     

     


    "반바지에 슬리프를 끌고 선글라스를 낀채로 술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가금씩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오면 천하없어도 술을 팔지 않습니다. 다 떨어졌다고
    이야기를 하지요."
    "정성을 들여서 빚는 술인만큼 먹는 사람도 정성이 필요한 법이지요."


    참 고집스러운 장인이 아닐수 없다. 아산의 명주 연엽주를 빚는 이득선 어른의
    고집스러움이 묻어나는 말이다.
    술을 빚을 때면, 집안에 있는 아홉 대문(솟을 대문, 안큰대문, 일각문, 중문,
    샛문, 사랑대문,안대문, 쪽문, 월각문)을 모두 걸어잠근다.
    목욕재계하고,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전화도 받지 않고, 대문 밖에서 누가
    불러도 대꾸하지 않는다.

     

     

    "똑같은 재료로 똑같은 비율로, 똑같은 노력을 들여 빚은 술이 어떨 때는 망치고
    어떨 때는 잘 되었다. 그게 이상해 곰곰 돌이켜보았더니, 술을 빚을 때 누군가와
    이야기하면 꼭 탈이 났다. 그 사실을 나이들어 절감하였다."
    그래서 그는 술을 빚을 때는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하고, ‘일구월심(日久月深) 지극
    정성으로 술에 전념한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술독도 손없는 방위에 놓아야 한다. 무진년이면 서쪽이 삼살방,
    북쪽이 대장군으로 흉한 방위다. 그래서 남쪽과 동쪽에 술독을 두고 빚는다.
    그래서 해마다 술독을 놓는 방위가 다르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술 빚는 날 일진을 봐서 손이 없는 방위를 다시 선택한다.
    물론 그해의 흉한 방위는  배제한 상태다. 서쪽에 손이 있으면 남쪽에만 술독을
    둔다. 이렇게 까다로운 절차 속에서 연엽주(蓮葉酒)를 빚는다.

     

     


    이득선 님은 참판댁에 사는데 참판의 손자다. 할아버지는 조선 말엽에 이조참판을
    지냈다. 벼슬은 이조판서까지 지냈으나, 일제가 섭정을 시작할 무렵에 오른 자리라
    무시하고 참판을 고집했다. 참판 할아버지는 고종의 아들 이은을 가르쳤고, 일제의
    섭정이 깊어지자 상소를 올리고 낙향하여 가난하게 살았는데, 고마움과 안타까움의
    표시로 고종은 집을 하사했다.
    집은 본디 70칸이었으나, 지금은 아홉 대문을 거느린 30칸 한옥으로 남아 있다.
    비원의 낙선재를 본따 지었는데, 중요민속자료 제195호다.


    연엽주는 이 집에 5대째 가양주로 내려오고 있다.
    연엽주와 그 한옥이 터를 잡은 곳이 외암리 민속마을이다.
    충청남도 아산시 설화산 서쪽 기슭에 있는데, 인위적으로 조성하지 않고, 살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민속마을로 지정했다. 그래서 요란하게 보여주는 것 없지만, 가보면
    정겹고 편안한 동네다. 돌담장 고샅길이 구비지고, 뒷산에서 타고내린 내「川」가
    마을 앞을 감돌아 나간다.
    마을 앞에 물레방앗간이 있고, 마을 안에는 한옥과 초가가 어우러져 있으며 연자
    방앗간도 있다. 원래 강씨와 목씨가 살았는데, 440여 년 전인 조선 명종(1534~1567)
    때 장사랑 벼슬을 지낸 이연(李涎) 일가가 정착함으로써 예안 이씨 집성촌이 되었다.


    이연의 후손인 이득선씨는 이 마을에 11대째 살고 있다.
    그는 대학원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례를 치르러
    낙향했다. 그때가 1970년대 초반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가정 의례를 간소화하라며
    장례 때 굴건 베옷을 입지 말고, 하얀 두루마기에 베헝겊 완장을 하라고 지시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씨는 벌금을 내더라도, 자식으로서 부모의 은공을 갚는 길은
    굴건 베옷을 입는 것은 물론이요 시묘살이까지 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씨는 무덤 앞에 여막을 치고,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곡을 하며 3년상을 치렀다.
    그 뒤로 이씨는 외암리를 떠나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제사 때면 옛 법대로 술을 빚었는데, 제주가 문화재가 되고 나서는 자식들 학비나
    마련할 겸해서 한 달에 한 독 정도 술을 빚는다.
    그러니 술을 판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술이 있다고 알리지도 않는다.
    마을 입구 어디에도 연엽주 안내 간판 하나 없다.


    참판댁 대문 옆에 도자기 술병 하나와 “대궐 연엽주 팝니다”고 적어놓은 게 전부다.
    그것도 술에 거나하게 취해 한잔 더 마시려고 청하거나, 행실이 고와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예 내주지 않는다.
    돈 때문에, 사당까지 모시고 있는 집안을 술집처럼 만들고 싶지 않아서다.


    연엽주는 손수 빚은 누룩으로 빚는데, 쌀·찹쌀·연잎·감초·솔잎을 재료로 쓴다.
    연잎은 처마 밑에 매달아 말려, 고두밥과 누룩과 함께 넣고 비빈다. 술 항아리에
    연잎이 너덧 장 들어가는데, 세게 휘젓다 보면 찢어지고 둥둥 뜬다.
    연잎을 구할 수 없는 겨울엔 연뿌리를 넣는다. 감초는 마지막에 댓 장 띄우는
    정도다. 술은 겨울이면 20일 정도, 봄가을이면 14일 정도, 여름이면 7일 정도
    숙성시킨다.


    술의 첫맛이 침이 괼 정도로 새콤한데, 술이 오래되어 시큼한 것과는 다르다.
    연잎 때문인지, 누룩에 들어가는 여러 재료 때문인지 맛의 근원은 좀더 음미해
    봐야 한다. 단맛이 없고 뒤끝에 누룩내가 잡히는데, 단술을 싫어하는 애주가들에게는
    편안한 술이다.
    14도인 술의 새콤한 맛도 두세잔째부터는 엷어진다.
    한두잔에 입이 적응하기 때문이다.


    이제 충청남도 무형문화재가 되었지만, 연엽주가 여전히 꽁꽁 숨어 세상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 이유를 알 만도 하다.


    이야기중에 좀더 기업화할수 없겟느냐는 질문에 어른은 이렇게 대답했다.


    "자식들이 술을 빚는다는 마음가짐이 아직 여물지 못해서 전수를 못하고 있다고..."


    이 한마디가 반디불이 이 꼿꼿한 어른에게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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