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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필- 활터에서 [두레문학 2012하반기호 수록]
    수필공간(隨筆空間)·칼럼 2012. 12. 19. 18:42

                             활터에서

                                                                                                    김대근

    종일을 직장에서 소음에 시달리다 퇴근하는 길에 오늘도 활터에 들렀다. 어둠이 드리워진 활터에는 또 다른 종류의 소음이 반겨준다. 풀벌레 소리들이다. 산중턱에 있는 활터의 체감온도는 훨씬 낮다. 일터에서 달구어진 심신의 열을 식히기에도 좋다. 전등을 켜고 어둠의 장막을 한 자락 걷어낸다. 반응이 느린 투광등이 설치된 과녁에 불이 들어오는 동안 활을 꺼내 시위를 메기고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사대에 자리를 잡고 시위를 당겼다 놓는다. 쉬익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어둠의 저편으로 날아간다.

    몇 번을 쏘아도 화살은 과녁을 빗나가고 만다. "이번에는"을 되 뇌이며 다시 심호흡을 하고 시위를 당겼다가 화살에게 자유를 준다. 잠깐의 정적 뒤에 들리는 "쿵"하며 과녁에 적중하는 소리가 활터를 가득 채운다. 하루 동안 마음에 쌓였던 잡음들이 진공 속으로 사라진다. 카타르시스가 온 몸의 세포마다 스며져 마음을 달뜨게 한다. 그렇게 한 순을 내고 잠시 쉰다. 한 순이란 한번 사대에서 쏘는 화살의 개수가 다섯 개이다. 첫 순에서는 겨우 한발만 적중이다. 오늘의 내 마음은 '산란심(散亂心)이다. 마음이 이리 산란하니 활을 접고 활에 대한 글이나 한 편 쓰는 게 낫겠다 싶다.

    중국의 오래된 기록들에서는 우리민족을 동이족(東夷族)이라고 한다. 그 뜻은 큰 활을 사용하는 민족이라는 뜻인데 실상 이 말과는 달리 우리 전통의 활은 작다. 년 전에 크게 인기를 끌어 7백만 이상의 관객을 끌어 모았던 '최종병기 활'이라는 영화에서 이 점을 잘 볼 수 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청나라 병사의 활은 장궁에 아주 강한 강궁이다. 반면에 우리 활은 그 보다 훨씬 작다. 청나라의 전신인 여진과 우리는 한 혈통이었다는 것은 역사학적으로 정설이다. 기술이 발전되지 못했던 과거에는 동북아시아 일대의 모든 민족들이 큰 활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고구려에 이르러 우리 민족이 복합궁을 개발하게 되면서 탁월한 사거리의 활을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고, 여진과 몽골은 기존의 큰 활을 계속 사용하게 되었다. 중국인들이 이야기하는 큰 활의 민족이라는 말은 자신들의 동쪽에 있는 모든 민족을 일컫는 용어가 되었다.

    인류의 무기사(武器史)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했던 활은 중세에 이르러 총이 발명되면서 역사에서 넘겨진 페이지에 위치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활은 근세에 이르기까지도 무기로서의 살상능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우리 전통 활의 살상력은 200미터가 넘는다. 몇 십 미터에 불과한 사거리를 가진 다른 민족의 활들은 중세이후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가 올림픽에 양궁종목이 생기면서 활은 전쟁무기에서 스포츠의 하나로 전향했다. 그동안 양궁종목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이루어온 업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러한 업적의 바탕에는 활에 대한 유전인자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활의 나라라고 해도 모자라지 않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도 활로 인해 업을 이루었으며 고려의 왕건도 활을 잘 쏘았다고 전해진다. 또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활 솜씨도 역사에 기록될 만큼 대단했다. 우리가 바보로 알고 있는 온달장군도 매년 봄 3월3일에 국왕이 베푸는 사냥대회에서 솜씨를 보여 장군이 되었다. 신라에서는 원성왕 이전에는 오로지 활 쏘는 실력만으로 관리를 뽑았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을 일기를 읽다보면 휘하 장수들과 활쏘기를 통해 친목을 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에 양반의 수가 점차 늘어나 조선 후기에는 이로 인해 부작용이 생길 정도에 이르게 되는데 이 역시도 활로 인해서였다. 조선이 주자학을 받아들여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하다 보니 막상 국란을 당하니 싸울 사람이 없었다. 인진왜란 이후 조정에서는 무과를 자주 시행했고 평민들도 무과를 통하여 신분상승을 꾀할 수 있었다. 무과의 주 과목은 활이었고 입신양명을 위해 마을마다 활터가 생겼고 장정들은 활터에서 미래를 꿈꾸었다. 그러니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활을 잘 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조선의 잠재력에 신경을 곤두세운 청나라는 우리 활을 만드는 중요한 재료인 무소뿔의 무역을 엄격하게 제한하기도 했고 조선활의 비밀을 알고자 사신이 올 때는 늘 활을 먼저 보자 했고 돌아갈 때는 활을 중요한 공물로 가져갔다. 청나라의 이런 노력에도 끝내 그들은 조선 활에 필적할 활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우리 활은 대나무나 벚나무가 주요한 재료다. 북한산 아래 우이동 계곡은 봄이면 벚나무 꽃이 볼만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곳과 남산의 벚나무는 북벌을 꿈꾸었던 조선의 유일한 군주 효종이 전쟁을 염두에 두고 심었다고 한다. 또 전남 구례 화엄사의 올벚나무(천연기념물 제38호)는 인조가 전쟁에 대비할 목적으로 심도록 했다는 설도 있다.

    시대가 변해 이제 우리 활도 국궁이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도 어느 도시이던지 활터가 없는 곳이 없다. 노인네들이나 즐기는 여가라는 인식을 벗고 요즈음은 젊은이들도 활터로 몰리고 있다. 이른바 대중스포츠로 영역을 확보해가고 있다.

    활터에 어둠이 깊어간다. 어느덧 산란심도 잦아든 것을 보니 내일을 알뜰히 살아갈 힘이 충전되었음을 느낀다. 노트북을 덮고 나니 시계는 10시를 가리키고 있다. 오늘도 늦었느냐는 집식구의 눈 흘김을 걱정하며 활터를 나선다.

     [두레문학 13호 수록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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