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삼행시- 노다지(배밭, 잠을 깨다) /김대근
    삼행詩 2010. 2. 7. 18:20

    배밭, 잠을 깨다


    노랗게 물 들이던 개나리 담장 너머
    다갈색 겨울빛에 몸을 적신 배나무들
    지겨운 엄동설한을 등에 업고 걸었다


    노굿이 일었던 흔적을 몸에 감고
    다는목 열두마당 북풍에 내맡긴 밤
    지랑물 모아 마신듯 토악질 하고 만다


    노루목 좁다란 길 저만치 걸어간 달
    다닥냉이 새몸 받은 立春날 아침
    지빠귀 노래 소리에 선잠을 깨는 봄


    노오라기 가지마다 매달린 지난해
    다랑이 골마다 새로 돋는 땅의 살갗
    지금은 봄의 난장판, 나른한 배밭

     

    *노굿: 콩, 팥 따위의 꽃을 말함.  이 경우 '피다'보다 '일다'로 사용함.
    **다는목: 판소리 창법의 하나로 떼지않고 계속 붙여서 내는 목소리
    *** 노루목: 노루들이 다니는 길
    **** 지랑물: 비 온 후 처마끝에서 떨어지는 초가지붕이 썪은 물
    ***** 다닥냉이: 2년생 풀, 식용으로 함
    ****** 노오랑이: 짧은 노끈, 배를 모호할 목적으로 하는 종이봉지를 묶는데 사용함

     

    ----------------------------------------------------------------------
    입춘이 벌써 며칠 지났다. 회사의 바쁜일 때문에 출근을 했다. 일부 부서만 일을 하는 휴일에는 간간히 들리는 망치질 소리와 용접 소음같은 것들도 확연히 줄어들어 적막하다. 점심을 먹고 공장의 가장자리를 한바퀴 도는 시간은 찌든 마음의 때를 벗겨내는 귀중한 순간이다. 공장과 개나리 담을 잇대고 과수원이 있다. 배나무와 사과나무가 절반씩 농로를 가운데로 심어져 있다. 처음부터 이곳이 과수원이었던 것은 아니다. 10년전에 인삼을 수확한 이후 과수원을 조성했다. 공장 옆 과수원이니 수확철이 되면 사과, 배를 몇 상자씩 경비실에 갖다두고 팔기도 해서 때로는 사과산의 시큼함과 배 과육의 달콤함으로 육신을 즐겁게 만들기도 한다.

     

    재작년쯤인가 여름에 공장 배수로가 막혀 물이 넘쳤다. 동료들과 함께 점검을 해보니 커다란 고라니 주검이 배수구를 막고 있었다. 한가한 시골길이었던 곳이 부근에 공장들이 많이 생기면서 새벽에도 차들이 번잡하게 통행하는 길이 되었다. 고라니는 새벽길 자신의 영역을 순찰하러 나섰다가 교통사고로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것인데, 운전기사는 그 주검을 배수로에 쳐박아 버린 것이다. 배수로는 박씨네 과수원과도 잇대어 있어서 청소를 돕겠다고 박씨도 나섰다가 고라니의 주검을 보자, 자신의 과수들 사이로 고라니 똥이 가끔 보이더라며 그 길목인 고라니목에 올무를 놓을까 했단다. 사과나 배가 열리는 계절에는 풀도 지천인데 고라니가 왜 과일을 먹겠느냐 했더니 농사짖는 입장이 되어보면 자신의 심정이 이해될 것이라고 했다. 그 날 죽은 고라니를 대신해서 누군가가 그 영역을 차지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남녘의 꽃소식으로 봄을 가늠한다. 그러나 무릎을 숙이고 몸을 낮추어 보면 귓볼에는 겨울바람이 매섭게 휘돌아쳐도 대지에는 봄이 보인다. 냉이나 쑥이 대지의 새로 돋는 살갗처럼 봄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요즈음처럼 겨울과 봄의 경계선상에 머물고 있을때는 고라니같은 초식동물에게 자연은 너무 잔인하다. 그러니 사과나무 배나무들이 음울한 겨울빛 살갗으로 건조하게 서있는 발치에 파릇하게 돋아난 냉이나 쑥은 그들에게는 소중한 겨울 양식인 셈이다. 밤이 되면 검정색 양탄자를 밟듯 조심스레 배밭으로 나들이를 올 것이다. 그들은 냉이와 쑥으로 허기를 면하게 될것이고. 밤새 남겨놓은 그들의 흔적은 배밭 주인 박씨를 불안하게 만들것이다. 올해 봄에는 박씨네 배밭의 울타리는 더욱 튼튼하게 둘러쳐 질 것이다.

     

    이 영역의 새 주인은 새로 튼튼히 쳐진 울타리를 넘지 못할 것이고, 옛 주인이었던 고라니는 백배쯤 가벼워진 몸으로 밤마다 순찰을 돌것이다. 이런 넋두리를 하면서 말이다.


    "허~ 내 몸이 왜 이렇게 가벼워진 것이야!"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