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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암리 학살 현장을 찾아서..
    여행기 2006. 4. 8. 10:50

    블로그앤 사이트가 없어지면서 백업하는 글..


    제암리 학살의 현장을 찾아서.. 
    2003-10-26 오후 10:51:28

     

     

     

    사람이 살아가는 최소의 사회는 가정이다. 그 다음이 지역이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가장
    큰 단위는 국가이다. 물론 세계도 하나의 큰 사회라고 할수 있으나 살아가는문제..
    즉 생존의 문제에서는 국가가 사실 제일크면서도 기본단위이다.


    이 세상은 항상 부족하다.따지고 보면 골고루만 나눈다면 결코 부족하지는 않다.
    사실 아프리카의 기아선상을 헤메는 사람도 미국인 한사람이 버리는 음식으로도 최소한
    10여명은 먹고 살수 있다고 한다.
    결국 우리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분배가 불균형하기 때문이며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은것을 가지려고 하는 욕심때문이다.

     

    결국에는 그 욕심이 국가적으로 전이되면 다른 국가와의 전쟁이 된다.
    여기서 국가가 지역을 가정을 개인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하고 가정을 해본적이 있는가?


    해외파병의 문제가 불거졌을때 어떤 시민단체의 책임자가 텔레비젼의 인터뷰에서
    `우리나라는 예로 부터 남의 나라를 침범한적이 없는 평화를 사랑하는민족인데~~`
    이 사람은 몰라도 무엇을 한참 모르는 사람이다.
    우리가 흠모해마지 않는 광개토대왕도..그 이전의 고조선도 중국을 침략해서 영토를
    넓힌 정복군중의 주요 국가였다.
    그러니 우리가 남의 나라를 침범하지 않은 것은 평화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힘이
    없어서였다.
    평화를 사랑한다고 함은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남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다.

     

    동물적인 본능을 가진 사람은 이분법에 능하다.
    항상 우리 편과 남의 편으로 나눈다. 넓게보면 인류는 하나지만 우선은 동양인과
     서양인..백인과 유색인..일본인과 한국인..한국인과 중국인..이렇게 좁혀들어가다
    보면 결국에는 끝이 없다.


    그러나 사람이 가장 잔인해지는 행위를 하는 것은 거의 대부분이 나라와 나라의
    이분법이다.
    전쟁이나 또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되었을때는 그 잔인함이 극에 달한다.
    그러므로 나라가 그 국가를 국민을 지키지 못할때는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부국강병은 결국 자기 국가와 민족을 지키는 길이다.

     

    서두가 무척 길어졌는데 2003년 10월 24일 금요일에 나는 조간신문의 정치인들의
    행태를 훑어보면서 우리민족은 참으로 박복한 민족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후 불과 3시간만에 올곧고 안목있는 지도자를 가지지못한 박복한 민족의
    비참했던 역사의 교훈을 직접 보고 왔다.

     

    아산에서 발안이면 엎어지면 코 닿을거리인데 며칠전부터 미루어오던 출장을
    가던 길이였다. 발안을 20여키로 앞둔 평택쯤에서 시계를 보니 11시 40분이다.
    머리속으로 계산을 해보니 남의 회사에 점심시간에 들어가는 것도 실례이고 
    보면 1시 30분쯤이되어서 도착해야 적당한 시간이니 거의 2시간이 빈다.
    결국에는 국도변의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고 12시 10분쯤에 발안에 도착했다.
    남는 시간을 제암리학살현장을 보는 것으로 정했다.

     

    거족적인 만세 시위 운동을 계획하면서,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던 종교계의
    대표들이 앞장 서서 마침내 1919년 3·1운동을 일으켰다.
    온 민족이 이에 가담하였으며, 태극기의 물결과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함성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 파급되어 갔다.이에 크게 당황한 일제는, 헌병 경찰은
    물론 육·해군까지 긴급 출동시켰다.
    평화적인 시위를 통하여 정당한 요구를 주장하던 우리 민족은 무차별 총격에 의해
    살상되었고,  가옥과 교회, 학교 등 건물이 방화, 파괴되는 등 극심한 수난을 당하였다.


    3월 30일 제암리를 비롯한 인근의 주민 천여명은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 때 일제 경찰의 발포로 시위군중 3명이 사망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흥분한
    시위군중이 일본인 가옥에 돌을 던지고,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지르자 사사카(佐板)를
    비롯한 일본인 43명이 30리밖의 삼괴 지역으로로 피신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정미업자 사사카는 그 보복으로 4월 15일 제암리사건 당시 일본군대의 길 안내를
    맡기도 하였다. 발안 인근의 마을 주민들은 4월 1일에도 발안장 주변의 산에 봉화를
    올리고 시위를 하였다.
     

    1919년 3월 30일 발안장날 시위 당시 군중들의 주재소 습격사건은 4월 15일 향남면
    제암리와 팔탄면 고주리에서 일제가 자행한 보복학살의 도화선이 되었다.
    3월 30일, 4월 5일 발안 장날 시위와 4월 3일의 화수리·수촌리 시위가 벌어진 후
    발안지역 치안을 맡기 위해 지원나온 부대는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이었다.
    중위 아리타(有田俊夫)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 발안에 도착한 것은 4월 13일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임무는 토벌 작전이 끝난 발안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시위 주모자들은 2차에 걸친 검거 작전으로 대부분 체포된 반면
    발안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모자들은 체포되지 않아 불안 요소로 남아 있음을
    안 아리타는 제암리를 토벌하기로 하였다.


    아리타는 4월 15일 오후, 부하 11명을 인솔하고 일본인 순사 1명과 제암리에 살다가
    나온 순사보 조희창, 그리고 발안에서 정미소를 하고 있던 사사카(佐板)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로 떠났다. 마을에 도착한 후 조희창과 사사카를 내세워 마을의 성인
    남자들을 교회로 모이게 한 뒤 사격을 가하고 예배당과 민가에 불을 질러 23인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이웃마을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인 6명을 총살하였다.

     


    증언 자료들을 종합하여 사건의 진행과정을 재구성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그러나 시간과 이름 등 세밀한 부분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다.
    ① 아리타 부대는 발안에 살던 일본인 사사카와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을 내세워
         제암리 주민 가운데 성인 남자(15세 이상)들을 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② 미리 명단을 파악한 듯 오지 않은 사람은 찾아가 불러왔다.
    ③ 아리타 중위가 모인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해 묻자 `안`(안종후
        권사로 추정)이란 교인 대표가 대답하였다.
    ④ 아리타 중위가 교회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격 명령을 내렸고 이에 교회당을
        포위하고 있던 군인들이 창문을 통해 안으로 사격하였다.
    ⑤ 사격이 끝난 후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⑥ 바람이 세게 불어 불이 교회 아래쪽 집들에 옮겨 붙었고 위쪽 집들은 군인들이
        다니며 방화하였다.
    ⑦ 교회에 불이 붙자 `홍`(홍순진으로 추정)과 `면에 다니던 사람`, 그리고 `노경태`
       (노불의 증언에는 `노`)가 탈출을 시도하여 `홍`은 도망치다가 사살되었고,
       `면에 다니던 사람`(안상용으로 추정)은 집으로 피신했다가 발각되어 살해당했고,
       `노경태`는 산으로 피해 살아 남았다.
    ⑧ 탈출하다 사살된 것으로 보이는 시체 두세 구가 교회 밖에 있었다.
    ⑨ 마을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달려 온 `강`(강태성)의 아내(19세)가 군인에게
        살해당하였다.
    ⑩ `홍씨`(홍원식 권사) 부인도 군인들의 총을 맞고 죽었다.
    ⑪ 군인들이 마을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인 여섯 명을 총살했다.

     


    제암리사건의 참상을 세계에 알린 것이 외국인 선교사들이었고, 그들의 관심이
    제암교회에 대한 방화와 기독교인 학살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흔히 제암리 기독교인들의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 만행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제암리의 경우만 해도 희생자의 대부분은 기독교와 천도교인이고
    독립만세운동은 고주리의 경우 천도교 지도자 가족 6인으로 희생자 23명 가운데
    11명이 천도교인으로 10명의 기독교인(종교미상 2명) 못지않은 수를 차지하였고,
    고주리의 경우는 6명 모두가 천도교인으로, 전체적으로 볼 때는 천도교인(17명)이
    기독교인보다 더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시말해 제암리·고주리 주민들의
    독립만세운동은 기독교인과 천도교인들이 제휴를 기본동력으로 하여
    전개되었던 것이다

     

     

     

    제암리 학살현장을 가기전에 만난 3.1운동 순국기념탑...

     


     

     

     

     

    제암리 학살현장인 제암교회..지금의 저 교회자리가 23인의 무고한 사람들을 가두어
    놓고 불질러 죽인 만행의 현장인데 새로 기념관으로 만들었다.

     

     

     

    기념관의 조감도 전경..

     

     

     

    23인의 순국열사를 위한 조형물.. 민초를 지켜주지 못하는 정치인들이 와보고
    반성해야 하는 곳..

     

     

     

    순국기념관으로 들어가고 있다..가슴이 미어진다..

     

     

     

     

    기념관 앞의 국기계양대와 기념탑..

     

     


     

     

    기념관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보아야할 영화..이 영화를 보아야 전체적인 이해가 쉽다.

     

     

     


     

    여러가지 찍을것이 있었지만 이 하나로 모든것을 함축할수 있겠다 싶어서..

     

     

     


     

    학살당한 23위를 합동으로 모신 묘소.. 편히 잠드소서..비록 지금은 우리나라가 이렇게

    어려우나 머지않아 좋아질겁니다..

    영령들이여...편히 잠드소서...

     

     

    나라가 그 국가를 국민을 지키지 못할때는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부국강병은 결국 자기 국가와 민족을 지키는 길이다.
    뒤돌아 나오는데 자꾸만 눈앞에서는 오전에 본 신문의 정치면이 자꾸만 흑백으로 오버랩이
    되어서 서글픈 마음이 된다.

    인간세상의 사연이야 어떻던 상관이 없는 은행닢만 자꾸 노랗게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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