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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李箱) 시인.소설가
    우표로 만나는 문인 2008. 7. 4. 15:28

     

    이상(李箱) 시인.소설가

     

     
    근대미술 시리즈(세번째묶음)
    구본웅의 '우인상' (1935년 전후)


    일찍이 야수파를 한국에 받아들이는데 선구자 역할을 한 서산 구본웅(西山 具本雄: 1906~1953)의이 그림은 그의 예술에 갚은 영향을 준 시인 아상의 초상으로써 이상(李箱)의 풍모가 요기띤 재기에 넘쳐 흐르고 있다. (우표포탈서비스 http://www.kstamp.go.kr 발행안내 참조)


    오감도 11호


    그사기컵은내骸骨(해골)과흡사하다.내가그컵을손으로꼭쥐었을때내팔에서는
    난데없는팔하나가接木(접목)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
    마룻바닥에메어부딪는다.내팔은그사기컵을死守(사수)하고있으니散散(산산)히
    깨어진것은그럼그사기컵과흡사한내骸骨(해골)이다.가지났던팔은배암과같이내
    팔로기어들기前(전)에내팔이或(혹)움직였던들洪水(홍수)를막은白紙(백지)는찢
    어졌으리라.그러나내팔은如前(여전)히그사기컵을死守(사수)한다.


    (조선중앙일보 1934.8.4 이상 )


    우리 문학사에 "이상"이라는 시인은 '이단아'라는 단어와 동일어로 기억된다. 그의 시는 알쏭달쏭한 숫자와 기호, 일상의 어법을 초월한 난해한 것이었다. 그는 1910년 9월 4일 이발업에 종사하던 부친 김연창(金演昌)과 모친 박세창(朴世昌)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1912년 아들이 없던 백부 김연필(金演弼)에게 입적하여 장손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백부의 교육열에 힘입어 신명학교, 보성고등보통학교,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거쳤고 졸업 후에는 총독부 건축과 기수로 취직하였다.


    경성고등공업학교에 재학하면서 문학에 관심을 보여 건축과 교지인 ‘난파선’을 만들었다.  1930년 ‘조선’지에 발표한 소설 ‘12월12일’을 시작으로 대중앞에 활자화된 그의 문학을 선보였으며 이듬해에는 조선건축회지에 시 ‘이상한 가역반응’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인의 길을 걸었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시 ‘오감도(烏瞰圖)’를 연재하였으나 빗발치는 혹평으로 15회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중단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그의 존재는 문단에 뚜렸하게 각인되었다.


    당시의 식민지 시대를 사는 문인들이 그러했듯 이상 역시 다방을 출입하며 세상을 향해 불만을 터트렸고 다방을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식스나인', '제비', '쓰루'등의 다방이 그것인데 그중에서 '제비'는 시생이었던 금홍과 살림을 차리기도 했던 곳으로 그의 대표작 '날개'의 부대가 되었다.


    태평양 전쟁을 앞둔 일제의 사상탄압으로 1937년 도쿄 니시칸다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하였다. 그러나 감옥에서 지병인 폐병이 악화되어 출감한 후 1937년 4월 17일 (향년 만26년 7개월)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객사하였다. 유해는 화장한 다음 경성으로 돌아와 같은 해에 숨진 시인 김유정과 합동영결식을 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치하였으나 후에 유실되었다.


    김해경(金海卿)이 본명인 그가 이상(李箱)이라는 필영을 가지게 된데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총독부 건축기사 시절 일본인 동료들이 그의 성을 이씨로 알고 ‘리(이)상’으로 불렀다는 설 등이 있으나 그림에 재주가 뛰어난 이상이 디자인한 고교의 졸업 앨범에 이상이라는 서명이 있어, 건축기사 근무 이전에 이미 이상이란 필명을 쓰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위의 우표는 국내 야수파의 거장 서산(西山) 구본웅(1906~53)이 절친한 친구였던 이상을 그린 초상화로 제목은 ‘우인상’(1935)이다. 이 작품은 일제 강점기의 시대상황과 시인 이상의 내면을 절묘하게 표현한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창백한 얼굴빛에 삐딱하게 문 담배 파이프, 날카로운 눈매는 시인 이상의 세상에 대한 냉소를 가감없이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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