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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왕조의 뿌리, 전주 경기전(慶基殿)
    여행기 2007. 9. 4. 17:43

     

    조선왕조의 뿌리, 전주 경기전(慶基殿)

     

     


    사적 제339호의 경기전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에 있다. 멀지 않은 곳에 풍남문과
    한옥민속 마을이 있어서 두루 엮어 관광하기에 적당한 곳이다.

     

    경기전에서 처음 만나는 것이 하마비(下馬碑)이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뜻이지만 말이 그다지 흔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이므로 누구든 여지서부터는 걸어가야 한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후기로 오면서 교자가 흔했는데 사람이 메는 교자도 여기서는 내랴야 한다는 것이다.

     

     

    홍살문...

    나라에서 관리하는 영역이라는 뜻이다. 효자가 나거나 충신을 배출한 곳에는 대부분 홍살문이

    있는데 홍살문이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개인적으로  세울 수 없었다. 모두 나라에서 내려주어

    홍살문이 있는 곳은 나라에서 관리하는 영역이라는 뜻인 것이다. 따라서 관원들은 자기가 맡은

    지방의 홍살문이 세워진 건축물은 따로 관리하여야 했다.

     

     

     

     
    제목을 조선왕조의 뿌리라고 한 것은 이곳 전주가 역성혁명에 성공하여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운 이성계의 고향이기 때문으로 그의 영정을 보관한 곳이기 때문이다. 태종 10년
    (1410년) 어용전(御容殿)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전주인 완산(完山)· 지금의 경주인 계림
    (鷄林)· 평양 등 3곳에 동시에 창건하여 태조의 영정을 봉안했다.


    그후 세종24년(1442년)에 그 소재지마다 다른 이름을 붙였는데 전주는 경기전(慶基殿)으로,
    경주는 집경전(集慶殿), 평양은 영종전이라 했다.


    관리를 위하여 종5품의 영(令)과 종9품의 참봉(參奉)을 각각 1인씩 두었다. 종5품의 벼슬은
    지금으로 치면 고등고시를 치루는 5급 사무관보다 조금 높은 벼슬이고 종9품은 9급 공무원
    에 해당하는 벼슬이다.


    임진왜란 때 경기전은 소실되었으나 이성계의 영정은 실록각에 보관중이던 조선왕조실록은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에 옮기어 보존할 수 있었다. 현재의 건물은 광해군 6년(1614년)에
    관찰사 이경동(李慶仝)이 다시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중건한 것이다.


    건물의 구성은 본전은 정면 3칸, 측명 3칸으로 되어있고 남향으로 지어진 다포식(多包式)
    맞배집 건물로 높게 돋우어 쌓은 석축위에 건축되었다. 건물 안의 3번째 기둥렬에 고주
    (高柱)를 세우고 그 가운데에 단(壇)을 놓고 영정을 보관하였다. 이 단의 양옆에는 일산
    (日傘)과 천개(天蓋)를 세워 장엄하고 있다.

     

     

     

     

    위패를 옮기거나 새로 모시거나 할 때 사용하는 가마들이다. 사람이 탈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단순히

    위패나 영정을 옮길때 사용한다.

     

    한 나라의  왕실 행사에 사용된 것 치고는 상당히 옹색해 보인다. 그만큼 조선 후반기에 들면서

    나라 살림이 옹색해 졌다는 반증이다. 대개 소진된 국력이 완전하게 회복되는데는 약 200년이

    소요된다고 한다. 물론 현대와 같은 글로벌 시대가 아니고 중세때의 이야기다.

    그러나 일거에 국력을 배가 시키는 방법은 타국을 침범하여 그 국력을 취하는 것이다. 조선은

    이미 임진왜란을 통해 국력이 소진되었고 겨우 제자리에 들어설 중요한 시점에서 이씨왕조의

    실정으로 갖가지 사회문제만 낳은채 기회를 상실하여 일본에 나라를 바친 꼴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 행색이 옹색하기 짝이 없다.

     

     

    사람이 타던 교자이다. 앞뒤로 4사람씩 8명이 메던 가마다. 아마도 왕실에서 종친이 오던지

    고관이 들렀을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을 가장 긍정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은 역시 기록문화이다. 왕조실록만 해도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자신의 실록을 만들 수 없었고
    후일 세상을 떠난후 사관들의 논의를 거쳐 사초에서 뽑아서 기록했다. 물론 사관들 역시
    사람이고 보면 소속정파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므로 다시 정치적으로
    포장되거나 폄하되기도 했다. 사관에 의해 가장 폄하되어 있는 군주는 역시 광해군이다.
    세종, 선조와 같은 칭호도 사실은 죽고 난후 실록을 만드는 과정에서 정해지는 것으로
    중간에 정치적 이유로 물러난 경우에는 칭호조차 없었다. 광해군이 왜 필요이상으로
    폄하되었는지는 경기전의 주제와 다르므로 언급을 미룬다.


    경기전옆에 있는 이곳은 실록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곳이다. 처음부터 있던건
    아니었고 세종조에 한양의 춘추관, 충주등 두곳에 있던 사고(史庫)를 성주와 전주에
    추가 하였다. 조선왕조에서 태조의 영정은 대단히 상징적 의미가 컸고 따라서 후일에
    어떤 일이 있을 경우 우선적으로 보호되리라는 세종의 선견지명이 있었던 같다.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화를 면한것이 바로 전주사고본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때 전주사고본을 빼고 모두 소실되자 사고는 접근성이 어려운 험지에 세워졌고
    그것이  태백산(경북 봉화), 오대산(강원 평창), 정족산(강화도), 적상산(전북 무주)로
    20세기 초까지도 실록이 보관되어 있었다.

     

     
    조선의 임금들 중에서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 다음으로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간 철종이다.
    철종(철종)은 조선의 제 25대 왕으로 헌종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수소문
    끝에 강화도에서 거의 천민으로 잔락한 철종을 찾아내 보위에 올리고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철종은 보위에 있는 내내 강화도의 나뭇군 시절을 그리워 했고 그때 언약을 했던
    여인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대왕대비는 사람을 보내 이 여인을 살해하고 말았다.


    수렴청정 기간이 길어지면서 탐관오리의 부패로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동학의 씨앗이
    심어 진 것이다.

     

    대부분의 조선 왕들이 문관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진 반면 철종은 철릭이라는 무관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아마도 철종의 출생내력이 못 마땅했던 위정자들의 따스한(?)

    배려일 것이다. 2중적 가치관으로 세상을 살면서 가렴주구만 일쌈은 유학자들~~ 오늘 날의

    학벌, 지연, 혈연의 잘못된 가치는 이미 이조500년 동안 심어진 것이다.

     

    실록각 앞에 있는 굽은 나무...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은 건국되지 않았으면 훨씬 우리 민족에게 긍정적이었을 것이다. 물론 세종과 같은

    뛰어난 성군도 있기는 했지만 결국 행동이 없는 유학의 테두리를 벗지 못한 위정자들에 의해

    발전할 도약의 기반을 스스로 허물어 버렸다.

     

    온갖 핍박에도 결국 다시 생명을 피워 올리는 민초들의 모습을 연상한다.

     

     

    마음에 쏙 드는 길~ 비가 와서 인지 운치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은 그 현상을 일으키는 어떤 원인들에 기인한다. 동학농민전쟁도

    그 원인 제공은 위정자 들이었다. 부패관리들이 양산된 것은 조선왕실의 무능함이 그 원인이다.

    더 깊이 연원을 따지고 들면 결국 내것을 버리고 중국사람이 되고자 몸부림쳤던 유학자들과

    그들을 이용하여 권력을 유지 하려고 했던 이성계에게 까지 올라가야 한다.

     

    이리 민족사의 가장 뼈아픈 한 장면인 위하도 회군의 주역... 이성계의 영정을 위해 지어지고

    관리되어진 경기전에서 잡생각에 빠지는 동안 비는 쉴새없이 내리고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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