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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 성삼문 선생 유허(遺墟)여행기 2007. 3. 21. 10:10
사육신 성삼문 선생 유허(遺墟)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는 단종복위를 꾀하다 죽임을 당한 사육신(四六臣)의
한사람인 성삼문(成三問) 선생이 태어났던 유허가 있다.
이곳은 성삼문 선생의 외할아버지의 고택이 있던 곳으로 이곳에서 선생이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백과에서 선생에 대한 약력을 추려서 옮긴다.----------------------------------------------------------------------------------
성삼문(1418(태종 18)~1456(세조 2))
아버지는 도총관 승(勝)이다. 외가인 홍주(洪州) 노은골에서 출생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
하고 묻는 소리가 3번 들려서 삼문(三問)이라 이름지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에 식년시에 응시하여 뒷날 생사를 같이 한 하위지와 함께 급제했다.
집현전학사로 뽑힌 뒤 수찬·직집현전을 지냈다. 1442년 박팽년·신죽주·하위지·이석형 등과
더불어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세종의 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독 禮記大文諺讀〉을 편찬했다. 세종이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을
만들 때 정인지·신숙주·최항·박팽년·이개(李塏) 등과 더불어 이를 도왔다. 특히 신숙주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13차례나 왕래하며 정확한 음운
(音韻)을 배워오고,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해오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큰 공헌을 했다. 1447년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1453년
좌사간, 1454년 집현전부제학·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 예방승지가 되었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 등 어린 단종의 보필세력을
제거하고 스스로 영의정이 되어 정권·병권을 장악했다. 이때 정인지·박팽년 등 36명과 함께
집현전 관원으로서 직숙(直宿)의 공이 있다고 하여 정난공신(靖難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국새(國璽)는 옮겨졌지만 주상(主上)이
아직 계시고 우리가 있으니 복위를 도모하다가 실패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고 다짐하며
단종복위운동을 결심했다. 그리고 이후 받은 녹봉은 월별로 표시하여 별도로 쌓아두고 손도
대지 않았다. 단종복위운동은 그를 포함하여 집현전 출신 관료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 박중림(朴仲林)·박팽년·유응부·권자신(權自愼)·이개·유성원·윤영손(尹鈴孫)·
김질(金) 등과 함께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한 구체적 계획을 세웠다.
1456년(세조 2) 6월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향응을 베풀기로
한 것을 기회로 삼아, 왕의 운검(雲劒 : 큰 칼을 들고 왕을 시위하는 것)을 맡은 성승과 유응부로
하여금 세조와 측근을 처치하도록 계획했다. 그러나 거사 당일 갑자기 한명회의 제의로 세자와
운검의 입장이 폐지되자 거사를 중지하고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거사가
탄로날 것을 두려워 한 김질이 세조에게 이를 밀고하는 바람에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다음날 달군 쇠로 다리의 살을 뚫고 팔을 잘리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신숙주의 불충(不忠)을 꾸짖는 기개를 보였다. 6월 8일 성승·이개·하위지·유응부·박중림·김문기·
박쟁(朴) 등과 함께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능지처형(凌遲處刑)을 당했다. 거사 관련자 70여 명은
각각 죄명에 따라 혹형·처형·유배 등을 당했는데, 그중에서도 성삼문은 멸문(滅門)의 참화를 당했다.
아버지 승을 비롯하여 동생 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과 아들 맹첨(孟瞻)·맹년(孟年)·맹종
(孟終) 등 남자는 젖먹이까지도 살해되어 혈손이 끊기고 아내와 딸은 관비(官婢)가 되었으며,
가산은 몰수되었다.<다음검색 백과사전에서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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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허비는 1668년(현종 9년)에 민유중(민유중)이 홍주 관찰사로 왔다가 선생이 살았던
유허를 둘러보고 선생이 태어난 노은동에 돌로 추모의 표시를 세우게 하였는데 뒤에 후일
그 자리에 송시열이 유허비를 세우게 되었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김진상이 썼다.'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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