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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오늘의 역사오늘의 역사(歷史) 2007. 2. 2. 10:08
2월 2일 오늘의 역사
국내
1801(조선 순조 1 ) 천주교 신유박해 시작
1876(조선 고종 13) 병자수호조규(강화도 조약) 맺음
1895(조선 고종 32) 독립문 세우기 위해 영은문 철거
1951 유엔총회, 한국전쟁에 개입한 중국탄핵안 가결
1955 재미 조국중립화위원회 김삼규, 중립화통일방안 발표
1956 북한 적십자사, 국제적십자연맹에 가입
1968 미국-북한, 푸에블로호 사건 비밀협상(판문점)
1976 문공부, 봄 국전을 가을 국전으로 변경
1979 한-미 정상회담, 주한미군철수계획 백지화
1989 대학생 과외 전면 허용
1990 남북한, 미국 스탠포드 대학에서 3차 군축학술회의 개최
1991 재야민주연합 이부영 씨 등 68명, 민주당과 통합 선언
2001 한국부동산신탁, 정부투자 공기업으로 부도처리된 첫 기업으로 기록해외
962 신성로마제국 수립, 오토 1세 초대황제에 취임
1875 오스트리아 바이올리니스트 크라이슬러 출생
1924 그리이스, 공화제 선포
1928 제9회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개최
1932 제네바 군축회의 개최
1935 최초의 거짓말 탐지기 테스트
1943 이탈리아의 바돌리오, 무솔리니 넘어뜨리고 임시정부 수립
1947 최초의 폴라로이드 사진 촬영 시연
1962 소련 지하핵실험 개시
1970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럿셀 별세
1982 미국 X선 레이저 장치 개발
1990 클레르크 남아공 대통령, 흑인민족지도자 만델라 석방 발표
2003 하벨 체코 대통령 퇴임, 극작가로 새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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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회 집단이던지 새로운 사상이 유입되어 정착하기 위해서는 전쟁이나 내부적 반발을
겪게 되는 법인데 약 200여년전에 우리땅에 전래된 서양종교인 천주교도 극심한 박해를
받으며 뿌리를 내렸다. 이 박해에는 정치세력들간의 투쟁적 양상까지 있었으므로 이를 일러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도 한다.
중국을 통하여 들어온 천주교는 당시 조선을 지배하던 성리학이 한계를 보임에 따라 자연히
진보적 사상가와 봉건 지배 체제에 염증을 느낀 민중을 중심으로 급격히 퍼져 나가기 시작해
18세기 말에는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이것에는 당시 사상적으로 관대하던 정조의 치세도
영향을 끼쳤고 서양인이 아닌 청나라 사람으로 신부가 된 주문모(周文謨)가 국내에 들어온
것도 계기가 되었다.
천주교의 확대는 유교적 가치관에 따른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있던 조선의 지배층에 대하여
큰 도전이 되었다. 특히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의례 등을 거부하는 것에 대한 사대부들의
반발은 상당하였다. 사상적으로 관대하던 종조가 죽고 나이어린 순조가 등극하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貞純大妃)는 1801년(순조 즉위년)에 사교(邪敎) ·서교(西敎)를 엄금 ·근절
하라는 금압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신유박해를 통해 정약용 등의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가 처형 또는 유배되었고, 주문모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사실 이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대된 천주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라는 것
이외에 당시 비집권 세력인 남인에 천주교도가 많음을 핑계로 노론(老論) 등 집권 보수세력이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 정치인들과 잠재적 반대세력인 진보적 사상가를 탄압한 권력다툼의
일환이었던 측면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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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사대사상의 상징이 모화관(慕華館)과 영은문(迎恩門)이였다. 말그대로 모화관은
중국을 사모한다는 뜻을 지닌 중국 사신들이 머물던 곳이고 영은문은 중국 황제의 은혜를
맞이한다는 뜻을 가진 곳으로 중국의 사신이 오면 때로는 임금이 직접, 때로는 고위관리가
직접 나가서 사신을 맞이하던 문을 말한다.
황제의 국가를 선포하고 대한제국이 수립되자 독립협회에서 서재필이 주동이 되어 모화관
남쪽에 1536년(조선 중종 31년)에 세워졌던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서양의 양식을
따라 독립문을 세웠다.
이 독립문의 건설은 몇 백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중국으로부터의 이탈을 선포하는 것과
같은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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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사진기는 필림만 가지고 있으면 언제던지 인화가 가능하다. 또 특정한 부분만을 인화
할 수 있어서 표현이 자유스럽다.
디지탈 사진기는 한발 더 나아가서 여러가지의 특수한 효과를 줄수도 있다.
그러나 폴라로이드 사진은 재탕이 없다. 한번 촬영에 한장의 사진이 나온다.그런 면에서는
가장 아날로그적인 사진이다. 또 폴로라이드 사진은 서서히 사진이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눈으로 즐길 수 있는 즐거움도 준다. 샷터를 눌러고 나면 사진기에서 나온 백지상태의 사진
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조금씩 사람의 형태가, 경치가 서서히 형성되어 간다.
사진기에서 나오자 말자 마구 흔들면 피사체의 모양도 바뀌기도 한다. 그러므로 폴라로이드
사진은 연습이 없다. 그런 면에서 우리네 인생과 너무 닮아 있다.
1947년에 최초의 폴라로이드 사진 촬영 시연이 있었다.'오늘의 역사(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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