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오늘의 역사
국내
561(신라 진흥왕 22) 경남 창녕에 척경비 세움
1019(고려 현종 10) 강감찬 장군 귀주 대첩 승리
1395(조선 태조4년) 우리나라 최초로 목활자를 이용, 대명률직해 간행
1883(조선 고종 20) 독립운동가 조만식 태어남
1906(대한제국 광무10) 일제, 조선총독부 전신인 통감부 설치
1919 대한독립선언 선포
김동인, 주요한 등 동경에서 최초의 문예동인지 <창조>지 창간
1935 우리 나라 최초의 종두 실시자 지석영 별세
1951 유엔,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비난결의안 채택
1962 주화 투입식 공중전화기 최초 설치
1968 경부고속도로 건설 시작
1970 TBC FM, 한국 최초로 FM 스테레오 방송 실시
1974 한국방송협회 창립
1983 손재식 통일원 장관, 남북한 당국 및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개최 제의
1987 한방의료보험 전국에 확대 실시
1989 한국, 헝가리와 수교
1992 행정기관과 정부투자기관의 업무용 및 자가용 차량 10부제 운행 실시
해외
1774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집필
1881 파나마 운하(총길이 64km) 기공
1902 청 나라, 만주족과 한족의 결혼 금지 해제
1917 독일, U보트를 동원한 무제한 잠수함작전 전개
1946 유엔 총회, 세계 공용어 정함
1949 헝가리 인민공화국 선포
1952 일본, 경찰 예비대를 중심으로 자위대 창설
1958 이집트와 시리아 합병선언으로 통일아랍공화국 정식 발족
1979 이란 혁명 지도자 호메이니, 15년간의 망명 끝에 귀국
1991 데 클레르크 남아공 대통령, 인종차별법 폐지 발표
2003 美 컬럼비아호 공중폭발, 승무원 7명 전원 사망
--------------------------------------------------------------------------
★
2월 February는 라틴어로 '정결한 달'이라는 뜻이다. 한해의 시작이 양력을 기준으로 하면
1월부터 새로운 한해가 시작이 되지만 태양의 황경을 기준으로 한 24절기를 기준으로 하면
사실 입춘이 있는 2월이 실질적인 새로운 한해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2월의 중요한 날은 2월 4일의 입춘을 비롯, 2월 14일의 발렌타인데이, 2월 18일 설날, 2월
19일의 우수등이 있다.
2월의 탄생별자리는 물병자리와 물고기 자리가 같이 있으며, 탄생석은 자수정(emethyst),
탄생화와 탄생목은 물망초와 소나무라고 한다.
2월에는 각 지역에서 벌어지는 볼만한 축제가 드물다. 그러나 제주도의 탐라국입춘굿놀이,
인제의 빙어축제, 거제도의 고로쇠약수제 등이 볼만하다.
★
옛 고구려의 영역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거란족은 야만적이며 자신의 이익에 따라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민족으로 인식되어져 왔다. 그것은 대대로 송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던 왕건도
같은 생각이여서 고려를 건국할 때부터 거란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게다가 고려는 건국을 하면서 고구려를 계승하여 옛 강토를 회복한다는 기치를 내세웠기에
자연히 국경을 마주한 거란과 잦은 충돌이 있어왔다. 이제 막 새롭게 웅지를 펼치기 시작한
거란의 입장에서는 중원을 장악하는데 있어서 배후의 고려가 늘 걸림돌이 되었다. 그래서
송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고려를 복속시킬 요량으로 3회에 걸쳐 고려를 침공했다.
1차 침공에서는 서희가 정치적 담판을 벌여서 오히려 강동 6주를 획득하게 되었으며, 2차
침공은 1009년(고려 목종 12) 강조가 목종을 시해하고 일으킨 정변을 핑계로 이루어 졌으나
별 소득없이 돌아갔고, 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며 소배압의 10만 대군을 동원
3차 침공을 했다. 이때가 1018년 (고려 현종 9년)의 일이다.
고려 조정에서는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에,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임명하고
당시 일부 수도방어군을 제외한 전체 고려전력이라 할 수 있는 20만 대군을 동원하여 거란에
대항하게 했다.
고려군은 압록강 유역 흥화진의 삼교천(三橋川)에서 거란군과 일차 접전을 벌였으나 거란은
수도 개경을 목표로 우회하여 계속 남하하였다. 남하하던 거란군은 자주(慈州)에서 대장군
강민첨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큰 타격을 받았으나 남하를 계속하여 개성인근까지 진출하여
개성을 위협했으나 선봉군이 개성의 방위군에서 패퇴하자 전력의 열세를 깨닫고 후퇴를
시작했다.
퇴각하는 거란군을 상원수 강감찬이 귀주(龜州)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접전하여 대승을 거둬
귀주대첩(龜州大捷)의 신화를 이루는데 10만의 거란군 중 돌아간 인원은 수천명에 지나지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거란의 병력은 10만에 불과하였고 고려군의 병력은 20만에
이르렀으므로 원정군에게는 절대 불리한 조건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