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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월 2일 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歷史) 2006. 12. 2. 00:07

     

     
    12월 2일의 지나간 오늘


    국내
      1863  대종교 교조 나철 출생
      1947  독립운동가 설산 장덕수 피살
      1952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한국 방문
      1961  MBC 라디오방송국 개국, 호출부호 HLKV
              국토건설단 설치법 공포
              서기연호 사용 법령공포
      1980  대청다목적댐 준공. 저수량 14억 9천만톤
      1991  지방의회 개회
               통신위성 무궁화호 GB, 럭키금성으로 낙찰
      1997  종금사 9개사 업무정지-나라 대한 신한 중앙 삼삼 신세계 쌍용 한솔 항도 경일
      1997  북한, 일본 동계올림픽 참가 신청
      2002  로또복권 발매 시작


    해외
      1804  나폴레옹 황제에 올라 대관식을 치름
      1814  "새디즘" 이란 용어를 만든 프랑스의 작가 '사드'사망
      1901  1회용 안전면도기 발명, 질레트
      1956  카스트로, 체 게바라 등 82명, `그란마호`를 타고 쿠바섬 상륙. 쿠바혁명 시작
      1982  미국 유타대학 메디컬센터에서 세계 최초로 인공심장 이식수술 성공
      1984  인도의 보팔에서 가스 폭발 참사
      1990  미소정상회담, 지중해 몰타에서 함상회담 갖고 냉전 종식 선언
      1999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출범. 영국의 25년 통치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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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종교의 창교자였으며 독립운동의 선봉이였던 나철 [羅喆, 1863~1916]이 태어났다.

     

    일제가 조선을 병합하였을때 만주벌판을 기반으로 한 독립투쟁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부분이 대종교의 민족정신의 고취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운동사에 그 이름을 높이 올리고 있는 박은식, 신채호, 김구, 조소앙등이 모두 대종교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였고 대종교의 최고목표가 국조를 섬긴다거나 포교가 아닌 독립쟁취에 있었기 때문에 종교단체라는 것보다는 차라리 독립운동 단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은 전남 벌교의 평범한 양반가에서 태어나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리로써 벼슬을 하다가 을사조약에 분개하여 벼슬길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그는 여러번에 걸쳐 일본으로 가서 외교적인 방법을 통해 독립을 외쳤으나 진전이 없자, 1907년 매국(賣國) 대신인 을사오적들의 암살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거사 직전에 탄로가 나 신안군의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가 고종의 특사로 풀려났다.

     

     

     

    1909년 음력 1월 15일 중광절(重光節)에 마침내 대종교를 창시하고 포교를 시작하였다. 그는 음력 3월 15일을 단군승천기념절(檀君昇天紀念節)로 정하고 대제(大祭)를 지내기도 했고 대종교를 통해 신채호 같은 민족주의자들을 결합시키기도 했다. 일본의 지배가 장기에 접어들자 나태함을 보이던 대종교 지도부와 동포들에게 독립운동에 기일층 매진하라는 교훈을 남기고 1916년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삼성사(三聖詞)에서 자결했다.

     

    "내가 이제 온 천하에 형제, 동포, 자매가 암흑한 장면으로 빠져가는 이들의 죄를 대신으로 받을지라. 이에 한 오리 목숨을 끊음은 천하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 "

     

    이말은 나철이 남긴 유서의 일부이다. 그는 일본의 탄압이 계속되자 독립운동도 소강기에 접어 들고 일반 백성중에는 일본의 지배를 당연시하는 무리도 많이 생기게 되자 그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경종을 울리려고 한것이다.

     

    나철은 대종교를 창시함에도 창교(창교)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다시 일으킨다는 뜻의 중광(중광)을 택하므로써 단군신앙이 예로부터 있어왔으며 그 사상이야 말로 가장 우리적인 사상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불교와 유교,선교도 모두 이민족의 사상이라는 것이 나철의 생각이였던 것이다.

     

    그가 남긴 저서에는 《신리대전(神理大典)》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백두산 북쪽 기슭인 만주 화룡현 청파호 언덕에 민족사관의 선봉에 섰던 무원 김교헌과 무장항일운동의 선봉에 섰던 백포 서일, 그리고 민족에게 내려진 시련의 짐을 지고 자결한 나철의 무덤이 초라한 형색으로 있다고 한다.

     

     


    1948년 8월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연호에 대한 법률"이 제정되어 단기(檀紀)를 공식연호로 채택하였으나 외교문서와 국내문서가 연호를 달리 사용하는데서 오는 불편함과 교육현장에서의 연대개념의 혼란등을 이유로 1961년 12월 2일 ‘연호(年號)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고 이듬해 1월 1일부터 단기(檀紀) 연호 대신 서기(西紀)를 공용연호(公用年號)로 사용한다고 발표했다.

     

    연호는 중국에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원래의 목적은 군주가 자신의 통치 연차(年次)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였다. 연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한나라 무제때 사용한 "건원(建元)"이다.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공개토대왕이 사용한 "영락(永樂)"이 처음이다. 그후 대한제국 순종의 연호인 "융희(隆熙)"를 끝으로 일제강점을 맞았고 1945년 美군정이 시작되면서 비로소 서기(西紀)가 도입되었다.

     

    여론조사에 의하면 국민의 54.5%가 단기와 서기를 같이 병용하기를 희망한 반면에 순수하게 서기만의 사용을 원하는 사람은 23.4%에 그쳤다고 하니 아직도 민족의 기저에 유구한 민족역사의 자긍심이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804년 12월 2일 교황 피우스2세가 참석한 가운데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황제 대관식을 가지면서 프랑스 제1제정(帝政)이 본격 시작되었다. 앞서 나폴레옹은 1804년 5월 28일 프랑스의 제정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었다.

     

     

     

    사실 나폴레옹은 유년기를 그리 잘보내지는 못했다. 1769년 그는 코르시카의 아작시오에서 태어나 프랑스인도 이탈리아인도 아닌 어정쩡한 가운데서 유년기를 보앴기 때문이다. 군대에서도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그는 프랑스 혁명의 흐름을 타고 성공가도를 달린 끝에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황제가 된 그는 프랑스 혁명의 '공화주의'를 부정하고 게속적인 침략전쟁을 벌여 국민의 신망을 읽고 결국 권자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의 말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다" 는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말로 남아있다.

     

     


    원세계가 자신을 황제라 칭하며 전제주의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그는 유난히 우리나라와 인연이 깊었던 인물이다. 조선말인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그는 조선에 파견되어 1894년 청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주로 조선에 머물렀는데 조선에서 생활하던 중에 상민들부터 아녀자까지 글로 소통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한글임을 알고 한글의 우수성을 깨닫게 되었다.

     

    원세계가 손문 초대총통의 양보로 중회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때 한 관리가 중국은 한자의 어려움으로 문맹률이 극심하다는 보고를 받고 조선의 한글을 중국인들에게 가르쳐서 문맹률을 낮추자고 했으나 중화사상에 찌든 각료들의 극심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원세계로 인해 한글의 우수성이 증명된 최초의 사례가 될 듯 하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라는 영화를 참 감명깊게 보았고 그 영화로 인해 테러리스트와 게릴라라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체 게베라를 다시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 영화는 체게바라가 의학도시절 오토바이로 아르헨티나와 칠레 일대를 여행하면서 타의와 권력에 의해서 핍박받는 수 많은 민중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혁명의 의지를 가슴에 담게되는 일정을 그린 영화이기 때문이다.

     

    1956년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등 82명의 혁명가들이  `그란마호`를 타고 멕시코를 출발해 야음을 틈타 쿠바섬 상륙하여 쿠바혁명의 횃불을 들었다. 마침내 혁명에 성공한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자 아르헨티나 사람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을 나온 그는 쿠바시민이 되어 라카바니아 요새 사령관,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등을 역임하여 '쿠바의 두되'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장기집권의 기틀을 잡아가는 카스트로에게 작별의 편지를 남기고 또 다른 혁명대상지를 향해 달렸다. 그는 단시 독재에 신음하던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부대를 조직하여 혁명활동을 전개했으나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은 정부군에게 포위되어 1967년 10월 부상당한채 사로잡혀 총살당했다.

     

     

     

    게바라[Guevara (de la Serna), Ernesto, 1928.6.14~1967.10]

     

    이 사람은 나의 영웅이기도 하다. 왠지 모르게~ 내 적혈구속에 테러리스트의 유전인자가 있는지도~

     



    20세기 최악의 환경재해로는 소련의 체르노빌과 인도의 보팔이라는 도시에서 일어난 가스폭팔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중에서 1984년 오늘 인도의 보팔이라는 지방에서 미국 유니언 카바이드사의 살충제 공장의 지하 가스탱크가 폭발하였다. 불과 2시간동안 메틸 이소시아네이트 가스가 45톤이 유출되어 보팔을 초토화 시켰고 그 후 4주동안이나 대기중을 떠돌며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빼았아 갔다.
     
    이 사고는 사망자만 6,900명에 이르렀고 50여만명이 중경상, 불구자, 성장이 멈춘 어린이가 되어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보상은 미미한 수준으로 25%정도만 보상을 받았을 뿐이라고 한다.

     

    선진국들이 자국의 공해산업이나 위험한 공장을 후진국으로 경제개발과 원조라는 당근을 내세워 내몰고 있는데 인도의 이 참사 또한 선진국의 배출구 역활을 한 후진국의 비극이라 하겠다. 우리나라도 과거에는 크롬도금이나 레이온 공장처럼 위험하고 공해를 많이 배출하는 산업들이 미국과 일본으로 부터 많이 이전했었다. 지금은 그 화살이 중국이라는 새로운 시장으로 옮기고 있고~

     

    딜레마다. 산업의 발전과 인류의 안전을 함께 담보하는 묘안은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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