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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운아 김옥균의 생가를 다녀오다.
    여행기 2006. 6. 16. 13:24


    풍운아 김옥균의 생가를 다녀오다.

     


    풍운아...
    한문으로 쓰면 風雲兒이다.


    김옥균...
    이 이름을 생각할때 마다 풍운아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것은 비단 나만의
    감흥일까?


    진보..보수...
    지금의 이 나라처럼 120여년전의 조선땅에도 진보와 보수의 세력싸움이 피를
    튀기던때가 있었다.
    단지 지금의 진보는 자주를 외치고 보수는 비국을 등에 업은 안정을 희구하는 것이
    그대와는 조금 다를 뿐이다.


    당시의 진보라면 김옥균을 비롯한 몇몇의 젊은 선비들이고 이들은 일본을 등에 업고
    정권을 잡고자 했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속했던 보수는 몇백년을 이어내린 청국을
    등에 업고 쥐고있는 정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면에서 본다면 김옥균이라는 인물도 역시나 일정부분 문제가 있기는 하다.

     

     

     


    여기서 잠깐 김옥균의 면면을 살펴보자.
    그의 직업은 아무래도 조선 말기 정치가로 해두는게 좋을듯 하다.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筠)·고우(古愚)였으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충청남도 공주(公州) 출생인데 지금의 밤나무재배로 유명한 정안면이다.


    어려서 산 하나를 넘어서 천안땅에 있는 외가에서 외조부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7세 때 그당시 세도가 하늘을 찌르던 안동김문의 리더였던 당숙 김병기(金炳基)의 양자로
    들어가 1861년(철종 12) 강릉(江陵)부사로 부임한 양부(養父)를 따라 릉에서 지내며,
    송담서원에서 율곡(栗谷)의 학풍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72년(고종 9)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급제하고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74년(고종 11) 고종의 특지로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에 올랐다.
    아마도 능력보다는 양부의 권력에 편승한 출세였으리라. 사실 그대의 고종에게는
    안동김씨의 세에 눌려서 인사권도 별로 없었다.


    새로운 사조(思潮)와 사회변동에 예민하여 유홍기(劉鴻基)·오경석(吳慶錫)·박규수(朴珪壽)·
    이동인(李東仁) 등으로부터 개화사상과 신학문을 배우고 개화당을 조직하여 지도자가
    되었다.
    81년(고종 18) 이동인의 알선으로 일본에 건너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진전과정과
    정치적 동향을 돌아본 다음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교리에 복직되었다.
    82년(고종 19) 임오군란 뒤 일본수신사(日本修信使) 박영효(朴泳孝)의 고문이
    되어 차관(借款)을 얻어오면서 일본의 힘을 빌려 국가제도의 개혁을 꾀할 결심을 굳혔다.


    귀국하여 승정원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에 올랐다가, 새로 설치된 외무아문(外務衙門)의
    참의(參議)로 승진하는 등 여러 요직을 거치면서 나라의 자주·근대화와 개화당의
    세력확대에 진력하였다.


    83년(고종 21) 국가재정과 신식군대 양성에 필요한 차관을 얻을 목적으로 다시 일본에
    갔으나 실패하였다. 이 때부터, 개화당과 개화정책을 탄압해 온 청(淸)나라와 수구파를
    제거하여 나라를 개화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84년(고종 22) 12월 우정국(郵政局) 낙성연
    (落成宴)에서 한규직(韓圭稷) 등 수구파를 제거해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다.
    이튿날 조직된 새 내각의 호조참판으로 재정권(財政權)을 잡았으나 청나라의 무력개입으로
    갑신정변이 사흘만에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건너가 10년간 망명생활을 계속했다.
    94년(고종 31)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으나 자객 홍종우(洪鍾宇)에게 피살되었다.
    그의 유해는 청나라 정부의 조처로 조선 정부에 인계되었다.


    매천 황현선생이 쓴 매천야록에 의하면 김옥균을 암살한 홍종우는 양칠(洋漆)을
    시체에 발라서 썩지않도록 했다고 하니 양칠이란 아마도 포르말린이 아닐까 생각한다.
    일본에서 강력하게 중국에 김옥균의 시신을 인도해줄것을 요구하였으나 조선정부에서
    홍종우가 조선의 관원이라는 임시문서를 중국정부에 보내 김옥균의 시신은 중국의
    호위하에 국내로 이송되었다.

     

     


                                           (능지처참을 당한 김옥균의 시신)


    지금의 노량진...
    노들강변의 모래밭에 김옥균의 시신을 무릎굻리고 목을 쳐 효수를 하고 사지는
    능지처참을 한다.
    아마도 조선의 역사에서 마지막 능지처참의 예로 남겨진듯하다.
    그후에는 능지처참의 기록이 없다고 한다.


    매천야록의 기록에 의하면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서 돌을 던지고 심지어는
    갑신정변때 죽은 유모의 아들 유모는 김옥균의 시신에서 배를 갈라서 간을 꺼내서
    씹었다고 하니 일본을 등에 업고 개혁을 하려고 했던 그들에 대한 일반민중들의
    감정이 어느정도였는지 짐작이 된다.


    물론 매천야록의 저자인 황현은 당시 벼슬얻기가 힘들었던 전라도의 유생에다가
    을사조약에 비감하여 스스로 목숨을 끓을정도로 보수측에 속하였으니 그 기록에
    다소간의 과장이 있기는 했다고하나 이 당시의 다른 기록과 견주어볼때 거의
    제대로 기록했다고 한다.
    김옥균에 대한 기록을 진보측의 입장으로 기록한 자료가 없다는 것도 또한 당시의
    민중들의 의식체계를 반증한다고 하겠다.


    대전으로 볼일이 생겨서 가는 길..
    회사에서 한시간 일찍 나온데다가 길운이 트였던지 별로 막힘이 없다.
    아산에서 공주로 가는 길..정안을 1키로정도 앞두고 시계를 보니 예상보다
    30여분 여유가 있다.
    오며가며 마음에 두고 있었던 김옥균의 생가를 찾아보기로 한다.


    천안-공주간에 시원하게 뚤린 국도에서 정안면이라는 간판을 보고 읍내쪽으로
    내려 3분정도면 김옥균의 생가이다.
    이렇게 가까운데도 그 동안 마음에만 두고 있었던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그의 생가는 충청도라는 같은 지방에 있는 한용운생가나 김좌진의 생가와는 또 다르다.
    친일본진보주의자에 대한 이동네의 인심을 말해주는듯 들어가는 길은
    농로 비슷한 콘크리트 외길에다가 생가앞 역시 차돌릴 공간이 없어서 후진으로
    아슬아슬하게 나오거나 전진과 후진을 10여회는 거듭해야 겨우 빠져나올수
    있을정도로 관심밖에 있는 곳이다.

     

     


    풍운아....
    역시나 김옥균은 풍운아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인물이다..
    그는 역사의 풍운아였다.

     

     


    이곳에 있던 민가 10호가 80년전에 불타없어졌다고 한다.
    옛날에 이곳을 감나무골로 불렀다고 하는데 유일하게 그곳에 버티고 섰는
    감나무 한그루가 그 지명을 암시하고 있다.


    역시 세월은 무상하다..우리의 삶은 허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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