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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론- 사이버 시대의 글쓰기 /김병중
    평론評論 2009. 11. 26. 17:19

           사이버 시대의 글쓰기

     

                                                                                                 김 병 중


      인터넷 이용 인구 3천만명, 인터넷 보급률과 휴대폰 보급률 세계 선두를 달리고 있는 나라, 이런 대한민국은 대단한 나라요, 그 나라에 살고 있는 국민도 대단한 국민이다. 세계화 정보화의 진전은 지구촌 시대를 열었고, 사이버 공간이 우리 삶의 주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시대에 사는 우리는 자신의 특별한 감정을 종이 위에 문자로 기록하면서 실시간으로 독자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경제적인 논리로 보면 이루어질 수 없는 무모한 투자같은, 하여 실익이 없고 손실만 눈덩이처럼 커지는 부실 업종이 되고 말 것이다. 부도와 파산으로 힘을 잃고 노숙자 신세로 음지에 누워 희망도 없는 나날을 소일하고 있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학은 단순히 경제적인 논리로만 따질 수 없다. 경제가 망하면 거지가 되지만 문학이 망하면 목숨이 끊어진다. 그러기에 문학은 이 시대의 호흡이요 맥박이며 강인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이버시대, 이제 진보와 보수의 싸움은 물러가고 환경이라는 세계 공존의 키워드가 이 시대의 파워 포인트가 되어가고 있다. 생태문학이 태동하고 생태운동과 생태사회주의, 생태적 자유주의, 심지어 생태 무정부주의가 출현하면서 하잘 것 없던 도뇽룡 한 마리가 인간이 꿈꾸는 직선도로의 개통을 수년간 가로막는 등의 유사한 일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다.

      변화난측한 세상, 이러한 시대에 글을 쓰고 있는 우리는 시대의 변화를 읽고 그 시대에 앞서가는 자세를 견지해야만 한다. 문학은 과거지향보다는 있을 수 있는 일이거나 있는 일이 주를 이룬다. 미래와 현재가 더 중요하며 과거는 상대적으로 비중이 떨어진다. 그러므로 글쓰기도 가능한 한 미래지향적이어야만 한다. 환타지 소설의 인기가 상승하는 것은 재미에 의한 일시적 관심도라기보다는 사람들은 늘 새롭고 호기심을 갖는 쪽을 선호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최근 논의되고 있는 신화적 환타지와 미래 고도의 과학기술적인 뉴미디어와 멀티미디어 지향의 통합을 지향하는 문화대혁명은 가능할 것인가?

      이러한 가능성에는 그 누구도 확언할 수 없다. 시대의 속도와 격랑은 예사롭지 않으며 언제 어떤 방향으로 머리를 돌릴지 모른다. 이때 문학에는 사이버(cyber-), 나노(nano-), 디지털(digital-), 이(e-), 테크노(techno-)등의 접두사 중 어떠한 것을 붙여야 되는가? 서로간의 관련을 갖고 있지만 아무래도 사이버라는 접두사가 가장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글 쓰는 이들은 저마다 전자우편을 사용하고 있으며, 문서 보관함이 있고 이외에도 개인 블로그가 있는가하면 문학도서관이라는 사이트에는 문인들의 서재가 빼곡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 저장되어 있는 작품들을 독자들이 직접 방문하면서 댓글을 달기도 하고 좋은 글은 퍼가기도 한다. 이럴진대 원고지에 잉크로 찍어 쓴 몇 줄의 글이 노트에 기록되어 책상 위에 놓여있다고 할 때 양자는 문학성 여부를 떠나 전파력과 가독성은 엄청난 차이를 갖게 된다.

      사이버시대에는 문학도 차별화를 원한다. 어슷비슷한 것보다는 뭔가 다른 점이 있어야 독자들이 찾는다. 불변이 없고 가변이며, 언어가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기보다는 시대의 변화와 기술의 힘에 언어가 의존해야만 된다. 동영상, 음성메일, PDA, mp3 등을 이용하려면 우리는 전보다 훨씬 더 많은 기술에 의존하며 더 많은 단어를 사용해야하는 것이다.

      만일 언어가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과 같은 발전을 이룩하지 못했다. 언어는 우리를 만든 어머니요 언어는 인간과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다. 이제 언어에도 괴짜가 필요하다. 괴짜는 상상력의 원천이며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그리고 변두리에서 주변으로 주변에서 다시 변두리로 무수히 넘나들면서 언어는 발전하고 있다. 언어의 변용, 천태만상의 모습으로 문학의 맛과 멋을 구현하게 한다.

      언어의 괴짜는 문학의 괴짜를 요구한다. 총신대 이상옥교수는 사이버시대에 걸맞는 디카시의 대중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름하여 “디카시”, 이를 다시말하면 디지털카메라로 실물 사진을 찍어 시를 곁들이는 장르이다. 사진과 시의 공존이다. 예를 들면 하나의 꽃을 디카로 찍고, 찍은 사진을 보고 느낀 사실적인 모습을 시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꽃과 더불어 숨쉬는 언어의 심미적 풍경이라고 말하지만 대중성과 선명성은 성공할는지 모르지만 아직 예술성에 대하여는 의문이 남는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관심을 갖고 모이며 이해도가 높다는 데 주시하여야 한다.


      분명 제비꽃인데 꽃이 지면 타조떼

      너른 들 달리는 꿈 감춰둔  뜻 있었나 보다

      긴 목에 솜털의 잔머리 꽃 아녀도 어여쁘다

                    

                          이상범-<타조군락-암동제비에게> 전문


     위의 시는 “암동제비꽃”을 사진과 함께 올려놓은 <타조군락>이라는 시다. 제비꽃이 피어 있을 때는 작은 하나의 풀꽃이지만 지고 남은 풀꽃의 머리는 잔머리 솜털이 보송송하고 뾰족한 부리를 내민 타조떼의 모습으로 카메라 렌즈에 잡혔다. 사진으로만 보면 제비꽃이 아니라 영락없이 타조떼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를 곁들임으로서 제비꽃 모습으로 존재하고 거기에 시적화자의 “너른 들 달리는 꿈 감춰둔 뜻”이 있었나 보다는 감정이 이입되어 시의 무게를 더하고 있다. 주와 종이 아닌 서로 동일한 무게를 갖고 있을 때 더욱  디카시로서 자리매김은 확연해진다고 주장한다.


      도시는 어미의 품이다

      어미는 매일같이 새로운 거미줄을 치고

      헛헛증에 혀가 녹아내린 채

      서성이는 귀가를 반긴다

      어미가 쳐 놓은 거미줄로 밤눈 밝히고

      염낭 가득히 서로 신음 채우다

      어미의 자궁이 뒤척여 빨갛게 물이들면

      낡고 진이 빠진 거미줄로 뒤로하고

      이면지의 공간으로 떠난다


                         김대근-<도시로 가는 길> 전문 

     

     위의 시는 이상범의 “암동제비꽃”과는 좀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하지만 이 시도 노을이 지는 저녁 무렵 거미줄을 치고 있는 거미의 모습을 디카로 찍은 사진을 연상하면 된다. 사진과 거미의 집짓기가 조화되어 어둠이 깔리는 도시는 한 장의 예술 작품같은 사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러한 시는 사진과 따로 떼어놓으면 시의 맛이 훨씬 반감된다. 그렇지만 사진과 함께 사이버 공간에 올려질 시와 사진이 서로 상생하는 효과를 갖는다. 이것이 디카시의 힘이며, 독자들에게 쉽게 읽히는 코드를 갖고 있다.


      초록 편지지 위에

      푸른 자벌레 한 마리

      온 몸 구부려

      한자 한자 글씨를 쓰지만

      몸이 연필도 되고

      지우개도 되어

      써도 써도

      흔적이 남지 않는 길

      자벌레 등에서

      구불 구불

      햇빛 휘는 소리 들린다


                       김병중-<자벌레> 전문 


      이 시 역시 한편의 디카시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자벌레 한 마리가 푸른 나뭇잎에 달라붙어 몸을 잔뜩 구부렸다 펴면서 진일보하는 자벌레,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구불구불 햇빛 휘는 소리가 들린다고 표현하고 있다. 시적화자의 감성이 전적으로 배제된 것은 아니지만 한 장의 디카로 찍은 사진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 광경을 보노라면 계절이 한여름인 듯 보여지고 시인은 자벌레의 일거수일투족을 현미경으로 자세히 비춰보고 있다.

      시인의 눈은 적어도 현미경이나 망원경이 되어야 한다. 현미경은 사물을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세밀하고 생생하게 바라보고, 망원경은 이와 반대로 원거리에서서 어렴풋이 윤곽만 보는 것이다. 이 거리를 시적 거리라고 하는 데 현미경일수록 사물시나 디카시에 가깝고, 망원경에 가까울수록 추상시나 관념시로 간주된다. 그러나 중간 정도인 무도수의 안경으로 보여지는 어중간한 시는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기 어렵다. 보편적이고 상투적이며 누구나 비슷하게 하고 있는 것을 적당히 옮겨 썼다면 그것에 대해 창작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사이버 시대에 살아남는 현대시의 새로운 정체성, 그것을 디카시가 미래에 대한 포용력을 확보하고 한걸음 진일보 할 수 있을지 한번 쯤 기대감을 갖게 되지만 급변하는 이 시대의 예측은 불안하고 한마디로 답변되지 않는다. 우리는 왜 써야만 하는가? 이런 질문 앞에 그저 우리 스스로가 좋아서 쓴다기보다 좋은 작품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쓴다고 답하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사이버 시대에 부응하는 글쓰기는 일반적인 글쓰기와는 달리 제목달기, 관심을 모으는 글쓰기, 마음을 움직이는 구성형식, 계속 읽게 하는 본문쓰기, 이해력을 높이는 새로운 스타일 등에 각별히 유의하지 않으면 사이버상의 클릭 횟수가 극히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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