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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을 처방전(그림과 시와 수필)
    수필공간(隨筆空間)·칼럼 2009. 11. 11. 20:47

     

     

     

    가을 처방전

     

                      김  대  근

     

    가을은 미각의 계절이다
    길을 나서 눈에 드는 세상 풍경은
    울긋불긋 잘 익혀놓은 신선로 같다
    부글부글 끊어대는 꽃게탕 같다
    빈한한 먹거리에 실조된 내 눈이
    가을이 맛있다고 탄성이다
    눈에 착착 감기는 오묘한 맛이란다
    눈을 자주 감았다
    과식하다 체 하면 이 가을 마음이 고생일게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생선가시나 덜 익은 힘줄 한가닥은 있듯
    복어 독처럼 톡 쏘아대는 가시에
    눈알을 정면으로 찔리고 말았다
    가을의 미각에 취해 탈 난 것이니
    누구를 탓하랴
    3만 원일지 7만 원일지 모를 처방전 한 장
    가을바람 타고 연처럼 날아오고 있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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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과치료후 의사의 처방없이 누군가가 좋다는 말만을 믿고 약을 과용한게 탈이나 고생을 바가지로 했다. 이름만 대면 다 알만큼 열심히 선전을 해대는 잇몸 약이다. 옥수수 수염에서 뽑은 성분이라니 더욱 믿음이 갔다. 암튼 나의 체질과는 맞지 않았던 탓인지 고생을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몇 년 만에 위 내시경도 했다. 염증증세가 있단다. 적어도 한 달은 치료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처방전 없이 마음대로 약 먹은 벌을 단단히 받는 중이다.

     

    몸의 상태가 영 아닌데도 미룰 수 없는게 출장이다. 대개는 상대방 회사와 협상을 통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싸워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회사끼리 회의하면서 너 잘했다, 아니 네가 더 잘했다 하는 경우는 없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위속의 센서가 제멋대로 작동을 해서 위산을 마구 뿜어대는 통에 아주 죽을 맛이다. 직장생활 32년 동안 아파서 결근해본게 통 털어 5일도 안되는 깡다구도 별무소용이다. 몸이 이러니 장거리 출장은 괴로움의 연장선이다.

     

    월요일 아침에도 새벽길을 나섰다. 남쪽에 단풍이 좋다고 하니 길은 또 얼마나 막힐 것인가 생각하니 위에서 몇 CC의 위산이 또 방출되어 인상을 찌그리게 만든다. 현관문에  모든 식구들이 볼 수 있게 "웃으며 하루를 시작하자"고 적어서 붙여 놓은 장본인이 나이니 웃었다. 찡그림과 웃음의 묘한 표정이 거울에 새겨진다.

     

    의외로 길은 편했다. 지금쯤이면 휴게소마다 단풍놀이가는 관광버스로 난리 부르스를 추어야 할 텐데 어찌된 일인지 승용차 몇 대와 화물차 몇 대가 전부다. 관광버스들이 단체로 파업이라도 하는 것처럼 조용했다. 하이패스 충전을 하며 예쁜데다 몸매도 좋은 언니(요즈음 젊으나 늙으나 언니라고 하는게 유행이더라) 물어보니 신종플루땜에 나들이 하는 사람이 확 줄었단다. 신종플루란 놈이 늦가을부터 초겨울을 좋아한다고 하니 그 녀석은 테스토스테론을 기저로 진화한 남성성을 가진 바이러스가 아닐까?

     

    나는 가을이 좋다. 양손을 바지에 찔러 넣고 입에는 하얀색 연기를 아주 적당히 뭉글거리며, 군청색 바바리 코트를 절반쯤 바람에 휘날리며 걷는 모습을 상상만해도 오금이 저린다. 본인 스스로 상상만해도 이 정도인데 실제라면 한 폭에 기천만원원쯤 하는 그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항상 상상과 거리를 가지고 있다.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데다가 다리가 짧아서 바바리를 살 수가 없다. 아버지가 우량 유전자를 몇개 넘겨주시며 덤으로 불량 유전자도 한개 같이 주셨다. 거부 할 수 있는 형편도 되지 못했으니 맞추어 살 수 밖에 없지 않는가.

     

    창원까지 가는 길은 눈이 호강을 하는 길이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풍경들이 그림의 연속이다. 수없는 미술작품을 보았고, 전시회도 무던히 다녔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화는 처음이다. 나무는 늙으면 저리 아름다워 지는데 사람은 어찌 더 추해지는 이가 많은지 모르겠다. 아마존의 원시부족 족장의 말처럼 인간이란 자연과 별개이고 자연위에 군림한다고 생각하는 탓일 게다. 자연이야 말로 최고의 선善이고 최고의 능력자이며 최고의 깨달은 자이고 최고의 주재자이다.

     

    가로수로 심어놓은 활엽수들이 저마다의 색으로 만든 점묘화에서 식욕이 느껴진다. 울긋불긋 온갖 재료를 버물려 바글바글 끓이는 신선로 속 같다. 빨간 양념이 듬뿍 들어간 꽃게탕 같기도 하다. 포도鋪道 내려 깔린 노란 은행잎들은 잘 숙성된 콩잎같다. 아내는 수없는 시행착오를 거쳐도 어머니의 그 맛을 내지 못한다. 어머니의 손 맛은 이제 묵힌 맛이 나는게 아니라 낡아간다. 소금간을 짜게 한다.어머니의 옛맛은 어머니도 이제는 읽어버린 것이다. 고개를 들어보면 멀리 산들은 옹기의 미세한 숨구멍으로 드나들던 햇살과 정분이 난 환희가 황금빛으로 제대로 익은 된장같다.

     

    자연이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 눈의 착각이고, 그저 인간이 붙인 형용사에 불과하다. 수천년, 아니 수천년을 자연은 그대로가 아니던가. 변한것이라고는오로지 인간들 자신 뿐이다. 자신이 변하는 것은 미덕이고 자연이변하는 것은 재앙이라고 한다. 인간의 유전자중 가장 빨리 진화하고 있는 유전자가 자신의 합리화일 지도 모르겠다. 이 아름다운 자연에 내가 녹아 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오늘은 정말 눈이 호강을 하는 날이다. 눈이 연신 맛이 있다고, 간이 닥 맞다고 되뇌이는 통에 과식을 염려해서 잠깐 눈을 깜박이는 사이에 색 좋은 단풍나무 아래서 이토오 히루부미 같이 생긴 녀석이 100전의 복수를 나에게 정통으로 한 방 날린다. 아차 싶어 브레이크에 발을 올렸지만 이미 과거는 흘러가 잡을 수 없고 미래는 저만치 있다. 속도계를 보니 20킬로가 초과고 네비게이션을 보니 18킬로가 오버다. 3만원과 7만원의 가늠자인 셈이다.

     

    나는 자주 가을을 앓는다. 아직 가을에 대한 면역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 아픈 가을에 엑스레이 한 판 찍고 받는 처방전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다. 100미터쯤 지나서 네비게이션의 미스某가 안전운행 구간이란다. 여자는 대체로 믿을 수 없을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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