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삼행시- 자화상(최치원 선생의 詩) /김대근
    삼행詩 2007. 10. 19. 14:21

    和寺(자화사)에 올라서 라는 최치원 선생의 詩중에
    角聲中朝暮浪  靑山影裏古今人(화각성중조모랑  청산영리고금인)
    墔玉樹花無主  風暖金陵草自春 (상최옥수화무주 풍난금릉초자춘)


    화사는 최치원 선생이 당나라에 있을때 항소의 난등으로 혼란한 일들을
    잊고자 찾은 절인데 들려오는 고향 신라의 소식도 역시 혼란하여 곧 망할것
    이라는 등의 소문이었다. 이 시는 자신의 처지와 고향을 그리워 하는 마음을
    화려한 옛 수도였으나 지금은 피폐해진 금릉을 빚대어 표한한 작품일 것이다.


    각畵角이란  목동이 부는 뿔피리인데 나라망한 흔적이 그 소리에 남았는데
    아침 저녁 구분없이 여전히 물결은 일고 청산의 그림자에는 옛사람과 지금 사람이
    있으니 아마 그리운 고향사람들과 다시 정을 쌓은 사람들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옥수霜墔玉樹란 서리에 옥같은 나무가 꺽임을 말하니 아마도 옥같은 나무란
    고향으로 돌아가자니 망해가는 나라요 남아있자니 호식好食일 망정 남의 나라라
    고민하는 마음이 여실하다.
    금릉이라는 옛도시에는 봄이 와도 황량한 벌판이 되어 있으니 나라의 흥망이
    이토록 허무 하다는 것이다.


    ----------------------------------------------------------------------


    최치원[崔致遠]857(문성왕 19)~?
    신라 말기의 학자·문장가이다.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
    868년(경문왕 8) 12세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서경(西京:長安)에 체류한 지 7년 만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裵瓚)이 주시(主試)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당시 당나라는 황소의 난등으로 혼란이 극에
    달해 있었고 황소의 난을 진압하기 위한 일에 관리들은 매달렸다.


    이때 군무(軍務)에 종사하면서 지은 글들이 뒤에 〈계원필경 桂苑筆耕〉 20권으로
    엮어졌다. 특히 881년에 지은 〈격황소서 檄黃巢書〉는 명문으로 손꼽힌다.


    885년 신라로 돌아와 헌강왕에 의해 시독 겸 한림학사에 임명되어 외교문서 등의
    작성을 담당했다. 그는 문장가로서 능력을 인정받기는 했으나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으로 당나라에서 배운 바를 자신의 뜻대로 펴볼 수가 없었다.
    이에 외직을 청하여 대산(大山)·천령(天嶺)·부성(富城)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했다.


    그는 불행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당나라에 있을 때나 신라에 돌아와서나 모두 난세를
    만나 포부를 마음껏 펼쳐보지 못하는 자신의 불우함을 한탄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
    산과 강, 바다를 소요자방(逍遙自放)하며 지냈다. 그가 유람했던 곳으로는 경주 남산(南山),
    강주(剛州) 빙산(氷山), 합주(陜州) 청량사(淸涼寺), 지리산 쌍계사(雙溪寺), 합포현(合浦縣)
    별서(別墅) 등이 있다. 또 함양과 옥구, 부산의 해운대 등에는 그와 관련된 전승이 남아 있다.


    특히 경남 함양에는 그가 당시 태수로 있으면서 상습 물난리 지역이던 이곳의 물길을 돌리고
    지리산에서 직접 채취한 수목을 심어 지금은 울창한 숲이 되어 있는데 그곳이 '함양 상림'
    으로 불리는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림 유적이기도 하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