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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0일 오늘의 역사오늘의 역사(歷史) 2007. 6. 20. 08:51
6월 20일 오늘의 역사
국내
645(고구려 보장왕 4) 당 태종, 안시성 공격
1419 이종무, 대마도 정벌
1646 조선의 명장, 입경업 장군 별세
1896(조선 고종 33) 이범진을 주미공사에 임명
1911 맹아와 고아를 위한 제중원 설치
1916 독리운동가 임병찬 순국
1926 국립박물관 경주분관 개관
1949 수도경비사령부 창설
1952 야당 인사들, 반독재호헌구국선언
1957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발족
1962 제2한강교 기공
1963 주민등록법 시행
1963 태풍 셜리호 남해안 강타, 사망 49명 실종 11명
1969 김영삼 의원, 괴한에 습격 당함
1973 중앙선(청량리-제천 간) 전철 개통
1974 태백선 전철 개통
1983 문교부, 학생체벌금지지침 발표
1985 제3차 남북경제회담 판문점서 열림
1986 고려대 구병삼 교수팀, 국내 첫 체외 수정 시험관 아기 출산 성공
1991 광역의회 선거, 민자당 압승
1994 KT(구 한국통신), 아시아 최초의 상용 인터넷 서비스 ‘코넷’ 시작
2005 정부 중앙청사 게시판에 아동,청소년대상 성범죄자 신상명단 공개
해외
1837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1904 일본, 괴뢰정부인 만주국 총사령부 설치
1946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발족
1963 미-소, 직통전화협정 조인
1968 육상 100m에서 '마의 10초벽' 돌파
1973 아르헨티나 독재자 후안 페론, 18년 망명생활 청산하고 귀국
1976 이탈리아 총선거 실시, 유러코뮤니즘 대두
1986 스페인 총선, 곤잘레스 총리와 노동자 사회당 승리
1990 그리스 크레타섬 근해서 유조선 시킹호 탱크 폭발 한국선원 5명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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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4년 6월 당은 고구려의 요동공격을 명령한 후 11월 수륙 양면으로 약 1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때 당군은 각종 공성용(攻城用) 기구를 총동원
했다. 당 태종은 다음해 2월에 뤄양[洛陽]을 출발하여 직접 원정길에 올랐다. 요동에 진입한
이세적(李世勣)의 군대는 개모성(蓋牟城)을 함락시키고, 장량(張亮)의 수군은 비사성(卑沙
城)을 함락시켰다. 태종이 직접 독려하는 가운데 645년 5월에는 요동성까지 함락시킨 뒤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했다. 백암성이 6월에 함락되자 태종은 안시성이 연개소문의 정변
때도 안시성 성주가 복종하지 않아 공격을 받았으나 항복시키지 못한 점을 들어 우회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보급로가 차단될 것을 염려한 이세적의 건의를 받아들여 안시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중앙정부에서는 고연수(高延壽)·고혜진(高惠眞)의 지휘 아래 말갈군을 포함하여
15만 명의 군사를 내어 안시성 구원을 위해 출동시켰으나 당군의 작전에 말려들어 고전
끝에 항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립된 안시성의 저항이 완강하자 이세적은 태종에게
성이 함락되면 남자를 모두 구덩이에 파묻겠다고 했다. 포위공격이 성과가 없자 당의 장군
들은 동남쪽에 있는 오골성(烏骨城)을 먼저 치고 곧바로 평양으로 직공하자고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태종의 손자 무기(無忌)가 오골성을 공격할 때 후방에서 안시성의 고구려군이 역공
할 가능성이 있다며 반대하자 이를 받아들여 계속 안시성을 공격했다. 하루에도 6~7차에
걸쳐 당군의 공격이 계속되었고 포거(抛車:투석기)가 날린 돌에 성벽이 무너지면 고구려
군은 재빨리 목책(木柵)을 세워 방어했다. 당군은 성 동남쪽에 성과 같은 높이로 흙산을
쌓아 성 안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흙산이 거의 완성될 즈음에 갑자기 무너지면서 성벽을
무너뜨리자 고구려군은 재빨리 성벽 밖으로 나와 이를 점령하고, 나무를 쌓아 불을 지르니
당군은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태종은 책임자의 목을 베고 싸움을 독려하여 마지막 3일간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으나 끝내 실패했다.
이렇게 공방을 계속하기를 3개월에 걸쳤으나 성은 함락될 전망이 없었고 당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져 있었다. 때마침 9월이 되어 요동에는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군량도 다하게
되자 태종도 크게 실망하여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태종은 철군하면서 안시성 성주에게
비단 100필을 선물했다. 나중에 태종은 "위징(魏徵:唐의 賢臣)이 살아 있었다면 원정을
못하게 했으리라"고 후회했다고 한다.
이로써 당의 1차 고구려원정은 실패로 끝났고, 그후 당에서는 일거에 공격하기보다는
자주 소부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피로하게 하는 방식을 택했다. 647, 648년에도 소규모
공격을 감행했지만 별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안시성 성주의 이름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비롯한 후대 사람들의 언급 속에 양만춘
(楊萬春 또는 梁萬春)이라고 전하지만 확실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음백과)'오늘의 역사(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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