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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월 29일 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歷史) 2007. 9. 29. 17:56

     

    9월 29일 오늘의 역사


    국내
       414(고구려 장수왕 2)  광개토왕비 세움
      1504(조선 연산 10)  갑자사화 일어남
      1890(조선 고종 27)  성공회, 우리 나라에 들어옴
      1896(조선 고종 33)  황토현-동대문, 대광통교-남대문 사이 도시계획
      1950  시인 김영랑 별세
      1970  신민당 전당대회, 표결로 대통령 후보에 김대중 지명
      1983  서울, 인천 등에 하수도료 첫 부과
      1984  잠실올림픽주경기장 개장
      1987  김대중-김영삼, 후보단일화 담판 결렬
      1990  북경에서 열린 남북체육회담에서 남북통일축구대회 개최 발표
      1997  서울 신길동 윤락가 강제 철거


    해외
      1868  스페인혁명으로 여왕 이사벨라, 프랑스로 망명
      1902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 별세, 대표저서: <목로주점>, <나나>
      1911  이탈리아, 터키와 트리폴리전쟁 개시
      1913  디젤 기관 발명한 독일 기술자 루돌프 디젤 별세
      1923  영국, 국제연맹의 위임으로 팔레스타인 통체 개시
      1938  뮌헨 회담,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1957  파키스탄 몽고메리서 열차 충돌. 250명 사망
      1962  알제리 초대 수상 벤 벨라 취임
      1971  인도 오리사주에 태풍 강타. 1만명 사망
      1979  일본-중국, 국교수립 공동 성명 발표


    -----------------------------------------------------------------------



    고구려의 장수왕이 자신의 즉위 다음해인 서기 414년에 지금의 만주 즙안현 통구에
    고구려 제19대 왕으로 우리 영토를 최대로 넓힌 광개토호태왕비를 세웠다.


    비석은 높이 5.34m, 너비 1.5m로 우리나라 최대이며 이 비석에는 첫면에 11줄,
    둘째면에는 10줄, 셋째면에는 14줄, 넷째 면에는 9줄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한줄이 41자로 총 1804자에 이르는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다음은 비문의 내용이다.
    +++++++++++++++++++++++++++++++++++++++++++++++++++++++++++++++++++++++++++
    옛적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 ; 물의 신)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聖스러운 …이 있었다.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 가게 되었다.
    왕이 나룻가에서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여라” 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이 떼가 물 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왕이 왕위에 싫증을 내니 (하늘님이) 황룡(黃龍)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승천(昇天)하였다. 


    유명(遺命)을 이어받은 세자 유류왕은 道로써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은 왕업을 계승
    하여 발전시키었다.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永樂大王)
    이라 하였다. (왕의) 은택(恩澤)이 하늘에까지 미쳤고 무위(武威)는 사해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
    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어여삐 여기지 아니하여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갑인년 9월 29일 을유(乙酉)에 산릉(山陵)으로 모시었다. 이에 비를 세워
    그 공훈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다. 그 말씀은 아래와 같다.  


    패려(稗麗 ; 거란족의 일파)가 고구려인에 대한 (노략질을 그치지 않았으므로) 영락 5년 을미(乙未)
    년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3개 부락 600~700 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말․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城, 力城, 北豊, 五備 □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 
     

    백잔(百殘 ; 백제를 비하하여 쓴 호칭)과 신라는 옛적부터 속민(屬民)으로 조공을 해 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辛卯年 ; 391년)에 건너와 백잔을 파하고(2자 缺) 신라 …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이 부분이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가장 쟁점이 되는 부분으로 일제에 의한 비문 자체에 대한 조작
    여부도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필자주>

     
    영락 6년(396년) 병신(丙申)년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百殘國)을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3字 不明)하여 영팔성(寧八城), 구모로성(臼模盧城), 각모로성(各模盧城), 간저리성(幹氐利城),
    □□城, 각미성(閣彌城), 모로성(牟盧城), 미사성(彌沙城), □舍蔦城, 아단성(阿旦城), 고리성(古利城),
    □利城, 잡진성(雜珍城), 오리성(奧利城), 구모성(勾牟城),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 □□□□城,
    頁□□□□城, □而耶羅城, 전성(瑑城), 어리성(於利城), □□城, 두노성(豆奴城), 沸□□利城, 미추성
    (彌鄒城), 야리성(也利城), 태산한성(太山韓城), 소가성(掃加城), 돈발성(敦拔城), □□□城, 루매성
    (婁賣城), 산나성(散那城), 나단성(那旦城), 세성(細城), 모루성(牟婁城), 우루성(于婁城), 소회성
    (蘇灰城), 연루성(燕婁城), 석지리성(析支利城), 巖門□城, 임성(林城), □□□□□□□利城, 취추성
    (就鄒城), □拔城, 고모루성(古牟婁城), 윤노성(閏奴城), 관노성(貫奴城), 삼양성(彡穰城), 曾□城,
    □□盧城, 구천성(仇天城) … 등을 공취하고 그 수도를 … 하였다.

     
    백잔이 義에 복종하지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阿利水 ; 한강)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백잔군이 퇴각하니 …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百)殘 임금이 곤핍(困逼)해져 남녀 생구(生口) 1천 명과 세포(細布)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 ; 신하)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太王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 임금의 아우와 大臣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영락 8년(398년) 무술(戊戌)년에 한 부대의 군사를 파견하여 肅愼 土谷을 관찰 순시하였으며
    그 때에 (이 지역에 살던 저항적인) 莫□羅城 加太羅谷의 남녀 3백여 인을 잡아왔다. 이 이후로
    (숙신은) 조공을 하고 (그 내부의 일을) 보고하며 명을 받았다. 


    영락 9년(399년) 기해(己亥)년에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왜(倭)와 화통하였다.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倭人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
    (城地)를 부수고 노객(奴客 ; 신라왕 스스로 신하라 일컫고 있다)으로 하여금 왜의 백성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歸依)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太王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계책을 (알려
    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10년(400년) 경자(更子)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安羅人) 수병(戍兵) … 新羅城 □城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이하 77자 가운데 거의 대부분을 판독할 수 없다. 대체로 고구려군의 원정에 따른 임나가라
    지역에서의 전투와 정세변동을 서술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 ; 왕)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명을 청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대에 이르러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하였다.
     

    14년(404년) 갑진(甲辰)년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帶方) 지역에 침입하였다. … 석성
    (石城) (을 공격하고 … ), 연선(連船 ; 수군을 동원하였다는 뜻) … 이에 왕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평양을 거쳐 (…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17년(407년) 정미(丁未)년에 왕의 명령으로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파견하여 사방에서 합전
    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갑옷이 만여 벌이었으며, 그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사구성(沙溝城), 누성(婁城), □住城 □城 □□□□□□城을
    파하였다.  


    20년(410년) 경술(庚戌)년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 친히 군대를 끌고 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여성(餘城 ;
    동부여의 왕성)에 도달하자, 동부여의 온 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여 (투항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을 하였다. 이때에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개선군을 따라 함께 온 자는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 비사마압로(卑斯
    麻鴨盧), 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 □□□압로(鴨盧)였다.
    무릇 공파한 성이 64, 촌이 1400이었다.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 연호(烟戶)(의 출신지와 戶數는 다음과 같이 한다)


    매구여(賣句余) 민은 국연(國烟)이 2가, 간연(看烟)이 3가. 동해매(東海賣)는 국연이 3가,
    간연이 5가. 돈성(敦城)의 민은 4가가다. 간연, 우성(于城)의 1가는 간연으로, 비리성(碑
    利城)의 2가는 국연. 평양성민(平穰城民)은 국연 1가, 간연 10가, 자연(訾連)의 2가는 간연.
    배루인(俳婁人)은 국연 1가, 간연 43가. 양곡(梁谷) 2가는 간연. 양성(梁城) 2가는 간연.
    안부연(安夫連)의 22가는 간연. 개곡(改谷)의 3가는 간연. 신성(新城)의 3가는 간연.
    남소성(南蘇城)의 1가는 국연.


    새로 공취해온 한(韓)과 예(穢)(의 烟戶는 다음과 같다.) 사수성(沙水城)은 국연 1가, 간연
     1가. 모루성(牟婁城)의 2가는 간연. 두비압잠한(豆比鴨岑韓)의 5가는 간연. 구모객두(勾牟
    客頭)의 2가는 간연. 구저한(求底韓)의 1가는 간연. 사조성(舍蔦城)의 한예(韓穢)는 국연
    3가, 간연 21가.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의 1가는 간연. 경고성(炅古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객현한(客賢韓)의 1가는 간연. 아단성(阿旦城)과 잡진성(雜珍城)은 합하여 10가가
    간연. 파노성(巴奴城)의 한(韓)은 9가가 간연. 구모로성(臼模盧城)의 4가는 간연. 각모로
    성(各模盧城)의 2가는 간연. 모수성(牟水城)의 3가는 간연. 간저리성(幹底利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미추성(彌鄒城)은 국연 1가, 간연이 7가. 야리성(也利城)은 3가가 인연.
    두노성(豆奴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2가. 오리성(奧利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수추성은 국연이 2가, 간연이 5가. 백잔남거성은 국연이 1가, 간연이 5가. 태산한성(太山
    韓城)의 6가는 간연. 농매성(農賣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7가. 윤노성(閏奴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22가. 고모루성(古牟婁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8가. 전성(瑑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미성(味城)은 6가가 간연. 취자성(就咨城)은 5가가 간연. 삼양성(彡穰城)
    은 24가가 간연. 산나성(散那城)은 1가가 국연. 나단성(那旦城)은 1가가 간연. 구모성(勾
    牟城)은 1가가 간연. 어리성(於利城)의 8가는 간연. 비리성(比利城)의 3가는 간연. 세성
    (細城)의 3가는 간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살아계실 때에 교(敎)를 내려 말하기를, “선조 왕들이 다만
     원근에 사는 구민(舊民)들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 구민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만일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 하셨다.


    왕의 말씀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에 따라 한과 예의 220가를 데려다가 수묘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들 한인과 예인들이 수묘의 예법을 잘 모를 것이 염려되어, 다시 구민 110가를
    더 데려왔다. 신구 수묘호(守墓戶)를 합쳐, 국연이 30가이고 간연이 300가로서, 모두
    330가이다. 


    선조 왕들 이래로 능묘에 석비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수묘인 연호들이 섞갈리게 되었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께서 선조왕들을 위해 묘상(墓上)에 비를 세우고 그 연호(烟戶)
    를 새겨 기록하여 착오가 없게 하라고 명하셨다. 또한 왕께서 규정을 제정하시어, “수묘인을
    이제부터 다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을 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이
    지 못할 것이니, 만약 이 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며, 산
    자는 자신이 수묘하도록 하라” 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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