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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8일 오늘의 역사오늘의 역사(歷史) 2007. 6. 28. 09:22
6월 28일 오늘의 역사
국내
1921 흑하 사변 일어남(소련이 흑룡강 자유시의 한국독립단부대 습격)
1950 북한인민군, 서울 점령
1954 변영태 국무총리, 국회 인준
1970 로스앤젤레스에 한국어방송국 개국
1974 현대조선, 울산조선소에서 -26만톤급 유조선 완공
1977 울릉도에서 처음으로 교통사고 발생(자동차 최초도입 6개월만에)
1977 외무부, 김형욱 청와대도청사건과 관련 미국에 항의각서 전달
1980 체신부, 컬러 TV방송의 방영방식을 NTSC로 확정
1985 AIDS(후천성면역결핍증) 환자 국내 첫 발생
1994 남북정상회담 예비접촉
1995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 박용길 이사장 방북
2003 서기7세기 추정의 마애불상 발견
해외
1577 독일에서 태어난 스페인의 화가 루벤스 출생
1712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룻소(1712-1778) 출생
1892 영국 정치학자 에드워드 할레트 카 출생
1904 덴마크의 노르게호, 스코틀랜드 록콜섬 근해서 조난, 620명 사망
1914 오스트리아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 사라예보에서 암살됨
1919 베르사이유 강화조약, 국제연맹 규약 조인
1947 파키스탄, 인도와 분리 독립을 결정
1948 코민포름, 유고 공산당 제명
1954 주은래-네루, 평화5원칙 발표
1967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병합
1979 석유수출국기구(OPEC), 기준유가 59%인상
1991 코메콘, 42년 만에 공식해체
2001 미국 항소법원, 마이크로소프트(MS)의 분할명령은 무효라고 판결
2004 미국, 이라크에 주권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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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이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우리의 젊은이들을
러시아 적군(적군:붉은군대)이 기습 공격하는 흑하사변이 1921년 6월 28일에 있었다.
1920년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등에서 참패를 한 일본은 한국독립군에 대한 대대적
공세를 펼쳤고 장비와 보급에서 열세인 독립군은 러시아의 영토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동하는 과정에서 미산[密山]에서 통합 재편성되어 대한독립군단이 조직되었으며
다시 안전지대인 연해주의 이만(달네레첸스크: 일명 자유시)에 집결하였다. 당시 이미
연해주에 자리를 잡고 있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에서 군대주둔지를 마련하고
독립적으로 활동하던 독립군들의 집결을 권했다.
당시 이곳에 집결한 독립군 부대는 간도지역의 독립부대인 최진동(崔振東) 등의 총군부
(總軍府), 안무(安武) 등의 국민회군(國民會軍), 홍범도(洪範圖) 등의 독립군, 서일(徐一)
등의 군정서(軍政署)가 있었으며, 노령지역의 의병대로는 김표돌의 이만군, 최니콜라이의
다반군, 임표(林彪) ·고명수(高明秀)의 이항군, 자유대대, 박그리골리의 독립단군 등이었다.
그런데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독립군대 중 자유대대와 이항군 사이에 독립군통수권을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났다. 즉, 이항군을 이끌었던 박일리아는 군통수권 장악을 위해
극동공화국 원동부(遠東部) 내의 한인부를 찾아가 이항군대는 자유대대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한다고 통고했다. 상하이파[上海派]의 이동휘계인 박애 등이 장악했던 극동공화국
한인부에서는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하여 박창은(朴昌殷)을 총사령관, 그레고리예프를
참모부장으로 지정하여 자유시로 보내는 동시에 이항군대를 사할린 의용대로 개칭하고
자유시에 집결한 모든 한인무력을 그 관할 아래 두도록 하였다.
그러나 박창은이 총사령관직을 사임하자 한인부는 그레고리예프를 연대장, 박일리아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두 사람은 즉시 군대관리에 착수하고 자유대대에 편입되었던
종래의 이항군대 ·다반군대를 마사노프로 이주시키고 간도군대도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자유대대는 끝까지 불응하여 장교들이 체포되었고, 무기들을 압수당하는 한편
이항군대와 다반군대에 의해 무장해제되고 지방수비대로 강제로 편입되었다.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독립군들에 대한 군권이 일단 이항군의 승리로 돌아가자 자유대대의
오하묵 ·최고려 등도 이르쿠츠크에 있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가서 독립군의 통수권을
자기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섭했다. 이를 받아들인 동양비서부는 임시고려군정회를 조직,
총사령관에 갈란다라시월린, 부사령관은 오하묵, 군정위원은 김하석 ·채성룡으로 임명하였다.
박일리아 등은 한인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위원회의 합법성을 주장하면서 극동공화국
정부와 교섭했으나 실패하였다. 1921년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한 갈란다라시윌린은 7일
자유시의 전부대를 소집하여 자신이 고려군정의회의 총사령관임을 선포하고, 8일 박일리아
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에 출두하라고 명령했다. 박일리아는 이를 거부하였지만
홍범도 ·안무의 군대는 자유시로 돌아갔다. 박일리아는 고려군정의회에 대한 반항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1921년 6월 27일 사할린의용대 연대장 그레고리예프도 투항하자, 갈란다라시윌린은 사할린
의용대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기로 했다.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사할린 의용대에 접근했고, 이후 제29연대 대장은 사할린의용대 본부에 들어가 복종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사할린의용대가 불응하자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자유시사변은 사할린의용군이 러시아 적군의 포위와 집중공격에 쓰러진 참변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 상하이 고려공산당 간의 대립투쟁이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이 전투 끝에 무장해제를 당한 사할린의용대는 전사자 ·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오늘의 역사(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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