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4일 오늘의 역사
12월 4일의 지나간 오늘
국내
1884 갑신정변 발발
1899 독립신문 폐간(창간 4년만에 폐간)
1904 소설가 이태준 태어남
1920 조선체육회, 제1회 전국야구대회 개최
1933 조선어학회, 한글맞춤법 통일안 발표
1961 해외여행금지법 폐지
1966 제1회 전국기능올림픽 대회 열림
1969 울진서 팬텀기 추락. 3명 사망, 가옥 6동 전소
1973 한국동굴학회, 충북 단양 고수동굴서 신석기시대 추정 음각벽화 발견
1979 김재규등 박정희 전대총령 시해사건 주범 공개재판
1988 국회, 일해재단 1차 청문회, TV 생중계
1990 윤석양 이병, 보안사 민간인 사찰 폭로
2002 국내 2위 광고회사 LG애드 외국회사에 매각
해외
1847 독일 낭만주의 작곡가 멘델스존 별세
1946 유네스코 헌장 효력 발생
1952 미국 제34대 대통령에 아이젠하워 당선
1979 이란 회교도와 학생, 테헤란주재 미대사관 점거 대사관직원 60명 인질
1992 제42대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46세의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 당선
1993 독일, 영국, 덴마크, 스위스에서 쿠르드족 반군 소행인 듯한 테러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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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고종 21) 12월 4일(음 10월 17일)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등이 주역인
개화당이 일본의 무력을 등에 업고 청나라에 의존하여 보수적 집단인 민씨 중심의 정치를
개혁하고자 정변을 일으켰는데 이것을 '갑신정변'이라고 한다.
이 정변이 일어난 배경을 보면 1882년(고종 19)에 일어난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이 서로 대립하게 되면서 조선의 정계도 두파로 갈라져 대립하게 되었는데
민비(閔妃)를 중심으로 한 민영익(閔泳翊)· 민승호등의 외척들과 김홍집(金弘集)· 김윤식
(金允植)· 김만식(金晩植)· 어윤중(魚九中) 등의 사대당과, 새로운 사상으로 사대사상을
타파하고 무능과 혼란에 빠진 조정(朝廷)을 재건하여 혁신정치를 지향하기 위하여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받아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는 독립당 또는 개화당의 대립이 바로
가장 큰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개화당은 동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신설된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회를 이용하여 거사
하려고 하였으나 민영익에게 중상을 입히고 실패하였다. 그러나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은
즉시 창덕궁으로 달려가 사대당과 청병(淸兵)이 변을 일으켰다고 왕께 거짓 고하고 고종을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겨 모시고는 일병(日兵)으로 하여금 궁을 호위케 하고, 입시(入侍)
하려던 윤태준(尹泰駿)· 한규직(韓圭稷)· 이조연(李祖淵)· 민영목(閔泳穆)· 민태호(閔台鎬)·
조영하(趙寧夏) 등의 사대당 일파를 살해하였다.
다음날인 12월 5일에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온 개화당은 각국 공사 및 영사에게 새로운
정부의 수립을 통고하는 한편 개화당의 사람들을 정부의 요직에 임명하였다. 6일에는
개혁적인 조치들을 발표하였으나 6일 오후에는 원세개(원세개)가 거느린 청병들이 도착
창덕궁을 호위중이던 일병들과 일전을 벌여 일병이 후퇴하면서 정변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일본공사관은 급히 철수를 했고 김옥균·박영효·서재필·서광범 등의 주역들은
다케조에 공사 일행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 사진은 갑신정변의 시발점이였던 우정총국 ***
이 정변으로 인하여 한·일간에 한성조약(漢城條約)이 체결되었으며, 청·일간에 톈진조약이
체결되어 동학농민운동 때에 일본이 무력개입할 수 있는 길을 텄다. 개화당이 전멸하다시피
한 조정은 사대당의 안전적 집권으로 더욱 보수적이 되었으며 청나라의 영향은 강해졌다.
김옥균에 대한 자료보기
☆ 풍운아 김옥균의 생가 구경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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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옥균의 유허(무덤) 구경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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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오전에 충청남도의 아산과 당진을 연길하는 삽교천 방조제 완공식에서
테잎을 끊었던 박정희 전대통령이 그날 밤에 자신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손에 저격을 당해 세상을 떠났다. 이른바 10.26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갑자기 권력의 핵이 사라진 정치무대는 신군부에 의한 권력장악으로 이어져서 그후로도
한참동안 민주화는 이루어 지지 못했고 광주사태등 수많은 회오리를 일으키기도 했다.
유신체제가 말기적 증세를 보이던 시기에 정치세력간에도 갈등이 빚어졌으며 차지철
경호실장과 갈등하던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였던 김재규는 직속부하인 박선호, 박홍주
등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는 사건(10.26사태)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1979년 12월 4일 첫 공개재판을 받았다. 이후 12월 18일 결심공판이 오전
10시 육군보통군법회의 대법정에서 재판장 김영선 중장, 법무사 황종태 대령 심리로
열렸다.
재판 결과, 육군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김재규, 김계원, 박홍주,
박선호에게 사형이 선고됐으며, 김계원을 제외한 나머지 전원에게 사형이 집행됐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암살된 시기의 국내외적 상황으로 인하여 핵무기 독자개발에 따른
미국중앙정보국(CIA)의 개입설이 퍼지기도 했다.
또 모르지... 미국은 원래가 믿을 수 없는 나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