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0일 오늘의 역사
11월 20일의 지나간 오늘
국내
1865(조선 고종 2) 조선 말기의 정치가 좌옹 윤치호 태어남
1896(조선 고종 33) 독립협회 독립관 준공
1897(조선 고종 34) 독립문 준공
1905 장지연,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 게제
1958 농협중앙회 발족
1975 대구 서문시장에 화재. 점포 1.900개 소실
1982 경찰, 서울강남지역 아파트 투기 수사 마무리
1985 제5차 남북한경제회담 판문점서 개최
2000 인천국제공항을 잇는 영종대교 개통
2002 북한경비정, NLL(북방한계선) 침범
해외
1910 톨스토이 사망
1945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개시
1954 미8군사령부 일본으로 이동
1959 세계 아동인권선언
1962 케네디 미국대통령, 쿠바해상봉쇄해제 선언
1975 스페인 36년간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 사망
1977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이스라엘 의회 연설
1985 MS윈도우 1.01리테일 버전 출시
1989 유엔, 어린이 헌장 채택
1993 마케도니아 비행기, 스페인 공항에서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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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정치가 좌옹 윤치호 태어난 날이다. 서재필등과 독립협회를 주도하였고
서재필의 뒤를 이어 독립신문 2대 사장을 역임했다. 또한 장지연과 함께 대한자강회를
만들어 독립정신을 고양하는데 주력했다. 1911년에는 105인 사건에 대한 혐으로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일제 말기에 변절하여 한때 귀족원 의원을 지내기도 했고 그 일로 광복후에
친일파라는 비난에 몰리자 마침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역사에 대한 기록을 잘 남겨 놓아야 한다. 특히 근세에 있어서 친일의 기록은 자세히 남겨
우리의 후손들이 나아갈 지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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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17일에 을사늑약이 보호조약이라는 허울을 쓰고 조인된데 대한 저항으로
<황성신문>에 저항논설인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실렸다.
이 논설은 쓴 사람은 황성신문의 발행인이였던 장지연이였다.
이 논설이 실린 11월 20일 신문은 1만부가 인쇄되어 새벽에 서울에 배포되었고, 장지연은
같은 날 새벽 5시에 체포되어 경무청에 수감되었다. 이날 황성신문사 사원 10명도 함께
체포되었다. 그날 신문에 실린 논설을 그대로 다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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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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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 이등 후작이 한국에 옴에 어리석은 우리 국민이 서로서로 모여 말하기를, 이등 후작은
평시에 동양 3국의 안정과 안녕을 맡아 주선하던 인물이라 금일에 한국에 옴에 반드시 우리
나라의 독립을 공고 하게 세울 방략을 권고하리라 하여 항구로부터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
상하가 크게 환영하였더니, 세상일이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 많도다. 천만 꿈 밖에 5조약이
어디로 비롯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대한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의 분열하는
조짐을 만들어 낸 것인즉 이등 후작의 처음의 원래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던가..
그러하거늘 저 돼지와 개만도 못한 우리 정부의 소위 대신 된 자들이 영리를 바로고 덧없는
위협에 겁을 먹어 놀랍게도 매국의 도적을지어 4천년 강토와 5백 년 사직을 다른 나라에
갖다 바치고 2천만 국민으로 타국인의 노예를 만드니 저들 개, 돼지만도 못한 외부 대신
박제순 및 각 대신은 족히 깊이 책망할 가치도 없는 자들인 것이다.
그러하거니와 명색이 참정 대신인 자는 정부의 수석 대신이라, 단지 부(否)자로써 책임을
궁색하게 면하여 명예를 구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가. 청음 김상헌의 서류를 찢는 통곡도
불능하고 동계 정온의 할복하는 것도 불능하고 여전히 생존하여 세상에 다시 서니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상 폐하를 다시 대하며 2천만 동포를 다시 대하리요.
아아 분하도다! 우리 2천만, 타국인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
이래 4천 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졸연히 멸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또 같은 해 1905년 12월 28일에는 신채호 선생이 대한매일신보에 '시일야우방성대곡'
라는 저항 논설을 게제했다. 참고로 다시 읽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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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일야우방성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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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천년 조국이 지금은 쓸쓸한 곳으로 변하였고, 2천만 형제가 괴롭고 고통스럽게 되었으니,
어찌 곡하여 울지 아니하겠소. 그러나 대한의 제군들은 행여 울음을 잠시 멈추고 나의 한
마디 말을 들으시오.
앞으로 하와이의 이민과 같이 미국 영토에 붙어 살까, 블라디보스토크의 유민과 같이
러시아 땅에 예속할까. 천지간에 나라 없는 백성은 어디에 살든지 노예는 고사하고
생명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오.
골패.화투가 왠일이오. 신문을 보고, 독서하시오. 저 기생과 축첩에 혹하여 빠지지 말고,
나라와 국민을 생각하시오. 관직을 사냥하려 굴을 뚫지 말고, 염치와 도리를 차려 보시오.
하늘에서 받은 자유권을 회복할 기회가 있을 것이오.
타인의 종살이에서 벗어날 방침이 있을 것이니, 나쁜 운수가 가고 좋은 운이 돌아오고
대한의 제군들은 생각하여 근면하도록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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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대문호였던 톨스토이가 가출하여 시골의 조그만 정거장에서 폐렴으로 죽었다.
톨스토이는 중부 러시아 츠라 시(市)에 가까운 조상 전래의 영지 야스나야 폴랴나 명문
귀족 집안에서 1828년에 태어났다. 그의 인생은 어쩌면 불행했다 할 것이다. 그 이유는
그의 가까운 혈육들이 모두 그의 곁을 떠나 버린 것이다.
그는 두 살 때 어머니를 사별했고 1837년 모스크바로 이사했는데 얼마지 않아 아버지와도
사별했다. 게다가 1841년에는 그의 후견인 오스텐 사켄이 죽어 아이들은 카잔에 사는 새
후견인 유시코바에게 인수되었다. 1844년, 톨스토이는 카잔 대학 동양어학부에 입학했으나
다음해 법학부로 전과했고 아카데믹한 학문에 불만을 느껴 결국에는 스스로 퇴학하고 야스
나야 폴랴나로 돌아왔다.
1862년에 그는 16세 아래인 궁정의(宮廷醫) 베르스의 딸 소피야 안드레예브나와 크레믈린
궁 부속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가정 생활과 창작 활동에 있어서나 가장 충실한 시기를
보냈다. <전쟁과 평화> 와 <안나카레니나> 같은 톨스토이의 출세작도 이때 완성이 되었다.
<전쟁과 평화>는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입이라는 사건을 소재로 황제로부터 일개
농민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인물을 등장시켜, 역사의 참된 주인공은 민중이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한 장편 역사 소설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전쟁과 평화'보다 뛰어난 소설로 평가 받는데 위선과 허식으로 가득
찬 상류 사회 속에서 패륜(悖倫)의 사랑에 자신을 관철시키기 위해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는
여주인공 안나의 비극과, 농지 경영에 땀흘리는 지주 레빈의 성실한 생활 태도를 대조적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사회제도에 도전하여 <이반 일리치의 죽음> <크로이체르 소나타>
<부활> <예술이란 무엇인가> 등의 반사회적 작품을 씀으로써 정부로 부터 반격을 받아
키스트로 낙인찍히고 러시아 국교에 속하지 않는 성령 부정파의 지도자로 지목되어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성령 부정파 교도들의 이야기를 담은 <부활>은 전세계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렀으며 그리스 정교에 비판을 가했다는 이유로 1901년 파문을 당했다.
그의 이러한 신념은 부인조차 이해하지 못했고 이로 인한 부부간의 다툼은 게속되었다.
마침내 톨스토이는 자신의 모든것을 버리고 집을 버리고 방황의 길에 올랐으나 11월 7일,
랴잔우랄 철도의 아스타포프역에서 폐렴에 걸려 하차, 역장 집에서 82년에 걸친 고뇌와
파란의 생애를 마쳤다.
그가 남긴 예술의 세계는 아직도 수많은 세상 사람들에게 마음의 울림으로 남아있다.
"행복한 가정은 한결같이 같다. 불행한 가정은 각각 그 결말에 따라 불행하다"
이말은 그가 작품에서 남긴 말이기는 하지만 그의 마지막 불행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어
오늘 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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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을 마약보다 더 독하게 의지하게 만든것이 "원도우"라는 괴물이다.
세대와 계층의 차이를 넘어서 이 윈도우만큼 세계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버린 예는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윈도우의 가장 강력한 적이라고 해봤자 리눅스 정도가 될터인데 아직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정도로 미미하다. 윈도우 XP도 내년이면 퇴물이 된다고 한다.
새로운 버전인 윈도우비스타가 나온다고 하니 그에 맞는 사양으로 올리려면 또 허리가
휘청해야 할 판이다.
언젠가 글에서 그랬지? 미국놈들은 늘 병주고 약 준다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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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개국때부터 사대주의를 기반으로 한 유학자들의 집권으로 망할때까지 모화慕華를
했다. 말기 청나라로부터 사신이 오면 대부분 왕이 직접 영은문까지 나아가 맞는 일도 많아
영은문은 사대의 대표적 상징이었다.
1897년 11월 20일 독립협회는 자주독립을 기원하며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따 지었다.
사적 32호로 지정된 독립문의 창건당시 면적은2,800㎡였다. 현재면적은 2,640㎡이다.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서재필이 독립문의 윤각을 스케치한 것을 바탕으로 설계를
담당했고, 토목·건축공사는 심의석이 담당했다. 중국인 노무자가 노역을 맡았으며 공사비는
기부금으로 해결했다.
독립문은 중앙에 14.28m, 너비 11.48m의 홍예문(虹霓門)이 있고, 왼쪽 내부에서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문 앞은 영은문의 주추였던 돌기둥이 두 개 있다. 문의 주재료는
화강암이다.
현재의 독립문은 원래의 자리에서 약 80m 정도 북서쪽으로 이동해서 복원되어 있는데 이는
1978년 성산대로 건설로 인한 것이다.